[아침뜨락] 이성범 수필가

얼마전 친구 세 명과 함께 엷은 분홍색으로 시작하여 날마다 곱게 물들어 가는 가을 산에 흠뻑 젖어보고 싶어 제천 수산 괴곡성벽길 산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다녀왔다는 것이다. 글쎄 3주전에 모 식당에서 우리는 점심을 먹으며 정확한 날짜와 각기 분담업무(?)까지 배정했다. 한 친구는 김밥을, 또 어떤 친구는 약간의 주류를, 또 어떤 친구는 다과를 ,나는 음주를 못하는 불행(?) 때문에 차량을 맡았다. 그리고는 그날의 즐거운 산행을 위하여 건배까지 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일로 인해 나는 그 사실을 깜박 잊고 말았다. 마침 그날이 되었는데 친구 3명은 각자 맡는 일을 준비해서 약속장소에 정확히 나왔다. 그리고는 나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5분이 지나 10분이 지나도 오지 않자 급해진 친구 한명이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자 "야, 왜 안와?"라고 다그친다. 내가 "어딜?"하고 물으니 그 친구는 "아니, 오늘 산에 가기로 했잖아?"하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을 한다. 그제야 나는 '아차, 그랬었지?'하며 순간 약속한 일이 생각났다. "어어, 그래. 미안해, 미안해, 곧장 갈께"하며 옷도 대충 입고 급히 차를 몰고 약속장소로 가서 그 날 대행사(?)를 간신히 치렀다.

참으로 미안하기 그지없다. 하루 내내 겉으로는 웃음을 짓고 즐거워했지만 내내 편치는 못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돌아보게 되었다. 약속은 신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왜 그때 스마트폰에라도 메모했더라면 이런 실수는 없었을 걸 하면서 말이다.

불현 듯 중학교 선생님으로 재직할 때 국어책에 나온 이하윤님의 메모광(狂)이라는 수필을 가르쳤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느 때부터인지 나는 메모에 집착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와서는 잠시라도 이 메모를 버리고는 살 수 없는, 실로 한 메모광(狂)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버릇이 차차 심해 감에 따라, 나는 내 기억력까지를 의심할 만큼 뇌수 일부분을 메모지로 가득 찬 포켓으로 만든 듯한 느낌이 든다. (중략)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을 때, 흔히 내 머리에 떠오르는 즉흥적인 시문(詩文), 밝은 날에 실천하고 싶은 이상안(理想案)의 가지가지, 나는 이런 것들을 망각 세계로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내 머리맡에는 원고지와 연필이 상비되어 있어, 간단한 것이면 어둠 속에서도 능히 적어 둘 수가 있다. (중략)나의 메모광적인 버릇은 나의 정리 벽(整理癖)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서적이며, 서신이며, 사진이며, 신문, 서류 등 정리 벽은 놀랄 만큼 병적이다. (중략)요컨대, 내 메모는 내 물심양면(物心兩面) 전진하는 발자취며, 소멸해 가는 전 생애 설계도이다. 여기엔 기록되지 않는 어구(語句) 종류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광범위한 것이니, 말하자면 내 메모는 나를 위주로 한 보잘 것 없는 인생 생활 축도(縮圖)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쇠퇴해 가는 기억력을 보좌하기 위하여, 나는 뇌수 분실(分室)을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다시 되새겨 볼수록 가슴에 저미어 온다. 역시 오래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은 메모가 답임을 오늘 새삼 실감나게 느끼곤 한다. 무릇 메모는 매우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다. 머릿속에 생각은 찰라처럼 들어왔다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잡생각들이 나왔다 들어 갈 때도 있지만 좋은 아이디어와 생각들이 번개처럼 들어올 때가 있다. 그때 지나가는 생각을 잡을 수 있는 무기는 메모뿐이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연구를 했다고 한다. 새로운 것을 한번 본 사람은 2주후에 그 내용을 불과 2% 밖에 기억 할 수 없다고 한다. 만약에 계속해서 6일 동안 같은 것을 본다면 2주후에는 그것의 62%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메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록한 메모를 보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우리 인간의 뇌는 계속해서 정보가 쌓일 때 그 정보가 머릿속에 남게 되기 때문이다.

이성범 수필가
이성범 수필가

그렇다. 시대가 바뀌면서 우리의 의식이나 시스템들이 많이 바뀌어 가고 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몇 개가 있다. 그중의 하나가 메모이다. 메모는 제2의 두뇌요, 삶의 경쟁력의 가장 근간이 되는 인간관계의 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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