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오계자 소설가

서둘러 벗어버린 맨몸의 큰 나무둥지들은 미끈한 육체미를 뽐내고, 다문다문 틈새마다 붉은 단풍나무 이파리가 갓 시집온 새댁처럼 상기된 얼굴로 11월의 계곡을 밝힌다. 붉음 속에 깔린 노란기운은 폭신한 느낌이 든다. 참 곱다.

이미 불타버린 백제 혜감국사의 자취는 주춧돌만 남았다지만 혼을 쏟아서 깎고 다듬어 중건한 조선의 도편수들을 상상하며 한발 한발 된비알을 올랐다.

象王山開心寺(상왕산개심사) 편액이 걸려있는 겹처마에 팔작지붕의 루가 귀티 난다. 미리 답사 자료를 보았으니 안양루라는 것을 짐작했다. 힘들어도 올라오길 잘했구나 싶다. 코끼리를 위해 만들었다는 직사각연못에 외나무다리가 놓여있다. 그 다리를 건너고 있는 벗을 찰칵 추억으로 담고 안양루 옆 해탈문으로 들어가다가 그만 쓸쓸한 기운이 감도는 공터에 멈춰 서고 말았다. 허허로운 바람이 헐렁하게 입은 바짓가랑이 속으로 스며들어 소름이 돋는다. 이 헙헙함은 마치 북적거리던 손님들 배웅하고 돌아서서 거실에 무질서하게 놓인 빈 그릇들을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어인 일인가. 여느 집 창고처럼 썰렁하고 산지사방 먼지 쌓인 안양루 내부의 허접스러움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안양'이란 곧 극락을 말함이란다. 너무 기대를 한 탓도 부인할 수는 없다. 불교 의식에 소중하게 쓰이는 법고와 목어, 운판 등이 보관 되어 있고 벽에는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라는 본생담을 주제로 귀한 그림이 그려져 있지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아 살짝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아미타불을 모시고 협시는 보살인데 왜 대웅보전인가요?" 해설사에게 물었다. 부처님을 잃어버려서 다른 절에서 모셔오고 편액은 그냥 둔 탓이란다.

물 한 모금 마시고 가슴을 여미며 아미타불 좌상 옆에 모셔진 입상협시보살을 보자, 가슴에 파문이 일었다. 본디 부처님이 내 자리 네 자리가 어디 있을까만, 좌상의 본존과 높이를 맞추려고 빌린 자리처럼 낮춰서 천년의 세월을 저렇게 어색하게 서서 계셨다. 우리 역사에 흔한 부처님 도둑, 참으로 세상이 원망스럽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서야 알았다. 물이 맑아야 물속을 볼 수 있는 법, 내 하찮은 상식이 마음을 흐려 놓았다. 우안(愚眼)으로 먼지만 보았고, 허접스러운 것은 바로 내 마음이었다. 어리석음의 격랑을 재바르게 가라앉히고 길게 숨을 쉬었다.

유난히 수난을 많이 겪었던 한반도, 이래저래 조상의 숨결인 문화재를 도둑맞거나 빼앗기다가 조정의 억불정책으로 사찰들을 불태웠단다. 외침이 아닌 우리의 부끄러운 왕조와 선조들이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랏일을 하시는 분들이야말로 역사공부를 해서 자자손손 훗날을 유념하고 무엇이 중요한지 깨달으면 좋겠다. 나라의 현실을 보면 민주국가의 가장 기본인 삼권분립부터 실행되면 좋겠다. 입법, 사법, 행정이 분립 되지 않은 나라가 민주국가란다. 훗날 우리 후손들이 역사공부를 할 때 누군가는 지금의 우리를 원망하겠지. 발전이 아닌 후진하고 있는, 입법부 금배지가 장관 눈치 보느라 별 희한한 짓거리 하는 시대도 있었다고 웃으며 안타까워하겠지.

오계자 수필가
오계자 수필가

내려다보니, 심검당과 명부전이 엄마 품처럼 오층석탑을 안온하게 감싸 안고 있다. 덩달아 나도 안온해 지는 느낌이다. 석탑의 기단에는 복련(伏蓮)이 새겨져 있고 옥석도 갖춘 귀공자다. 현대인들도 따르기 어려우며 건축예술의 극치라는 대웅전의 옆모습을 바라보니 상처투성이 천년의 세월이 한줄기 건듯 바람처럼 스친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하늘이시여 부처님이시여! 이제는 부디 세속의 바람은 세속에서만 불게 하소서. 합장하고 기원해본다. 세속의 부정부패는 세속에서도 사라지게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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