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린 날의 일상
눈 내린 날의 일상
  • 중부매일
  • 승인 2021.01.14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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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뜨락] 최한식 시인

날이 샐 때가 되지 않은 듯한 데 방안이 부옇다. 창문을 열기 싫어 자리에서 뭉그적거리다 일어나 문을 여니 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다. 반가운 마음과 함께 계단에 얌전히 내려앉은 두툼한 눈에 염려가 달라붙는다. 겨울에 미끄러운 층계에서 막내도 사위도 낙상으로 다쳤던 일이 떠올라서다. 아내는 어느 새 플라스틱 빗자루로 눈을 쓸어낸다. 눈 속에 출근할 딸들을 생각하나보다.

가는 눈이 푸슬푸슬 내린다. 밤새내린 흰 눈이 은총이요 선물 같이 귀하게 느껴지던 그 때가 언제였던가? 추위 속에 한참을 바라보다 기쁜 소식인 양 식구들에게 눈이 하얗게 왔다고 조그맣게 말했었다. 털모자와 장갑을 끼고 댑싸리 빗자루로 아까운 듯 집 마당과 출입로를 조용조용 쓸어낸 내 발간 손을 보시고 어머니 아버지는 어린 막내를 칭찬하셨다.

집 앞에 쌓인 눈을 차들이 지나가며 다져놓는다. 신발과 옷에서 눈 털어내는 툭툭, 탁탁 소리가 정겹다. 어릴 적엔 마냥 즐겁기만 했던 눈이 이젠 걱정이다. 나도 어렵지만 출근하는 딸들이 염려되어서다. 아내는 차에 쌓인 눈을 쓸어내고 들어온다. 이런 날은 가능한 외출하지 않는 것이 내 삶의 원칙이다. 오후가 되어 웬만큼 눈이 녹았거니 하고 창밖에 서있는 차를 보았더니 여전히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앞 유리에 쌓인 눈이 얼었다.

내 짧지 않은 경험으로 미루어 이런 때는 차를 한번 운행해야 쌓인 눈이 빠르게 녹아내린다. 안으로 들어와 앞 유리 얼음을 떼어낼 도구를 찾는다. 언젠가 받아온 CD가 이럴 때 유용하다. 그것으로 차 앞 유리를 박박 문지른다.

바뀐 신호를 받아 달리는 차 뒤로 쌓였던 눈이 날리는 게 차 안 거울에 비친다. 공동주택 입구와 경사진 언덕 올라오는 길이 아직도 험하다. 남북으로 뻗은 도로는 한낮의 햇볕에 눈들이 녹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서있던 방향과 달리 차를 세운다. 한겨울에 마음은 벌써 봄이다. 사계절 중 겨울이 가장 싫다. 겨울은 내 발을 묶고 나를 집안에 가둔다.

세 방향이 담으로 둘러싸인 집으로 돌아오니 뒤뜰의 조릿대는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추운 듯 떨고 있다. 양측 뜰 꽃 배추는 눈 속에 원색을 묻고 간신히 윤곽만 유지한 채 버티고 있다. 길 건너 펀으론 담장 위 푸른 기와가 눈들을 하얀 모자처럼 쓰고 있다.

흐릿한 하늘 아래 눈발이 그쳤다 내리기를 반복하며 날이 저문다. 녹았던 길이 다시 얼어붙고 이제는 돌아올 딸들의 퇴근길이 걱정이다. 눈이 내리니 조심조심 오라는 문자를 가족 카톡방에 올린다. 사방이 어둠에 묻히고 밖을 주시하는 내 눈 속에 수만 년 전 겨울을 나는 인류의 모습이 담긴다. 그들도 한 겨울 눈 내리면 동굴 속에 약한 불 피워놓고 입구에 앉아 내리는 눈과 하얗게 변해가는 산과 들을 맥없이 바라보았으리라. 꽃향기 가득한 산과 들에서 들짐승들 사냥하던 추억들이 떠올라 그러한 날들을 그리다 동굴 안으로 슬며시 들어가 뒤척이다 잠들었을 게다.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시인

그들은 어쩌면 꿈속에서 온 동네 사람들이 원색 꽃들이 물결치는 푸른 벌판을 함께 달리고 소리치며 멧돼지를 모는 장면을 만들어 내고 있을지 모른다. 나도 단조로운 색감의 겨울을 살면서 천연색 꿈을 꾼다. 밖에는 여전히 사락사락 눈 내리는 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폭설이라 한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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