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은희 수필가·㈜대원 전무이사

엄혹한 시절은 우리의 삶을 벼린다. '겨울은 추워야 제맛'이라지만,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걱정되는 날이다. 그러나 창밖의 사람들도 나목처럼 이 겨울을 끈질기게 버텨내리라. 문득 빈센트 반 고흐의 우윳빛 꽃 핀 아몬드 나무가 떠오른다. 한 번도 본 적 없어 더욱더 신기한 나무이다. '꽃 피는 아몬드 나무'는 고흐의 37년 인생 마지막 봄에 그린 꽃나무 그림이다. 자신의 조카에게 준 첫 선물이기도 한 아몬드 나무 꽃은, 유럽 땅에서 긴긴 겨울을 이겨내고 초봄에 가장 일찍 피는 꽃이다.

겨울 나목에서 피는 꽃들은 여럿이다. 그중에 아몬드 나무 꽃을 바라보며 고흐는 새로운 생명을, 카잔차키스는 신을, 카뮈는 찬란한 희망을 말한다. 대문호들은 겨울나무를 허투루 보지 않고 문학으로 승화시킨다. 나무와 꽃에 생명과 희망을 불어넣어 인간의 고단한 삶을 위로한다. 더욱이 오래된 나무에는 정령의 신이 깃들어 있단다. 그래서 하늘을 우러러보듯 헐벗은 나목도 한없이 우러러보는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땅속에 뿌리를 박고 하늘에 가지를 걸치고 있는 나무, 그것은 별과 우리 사이를 잇는 길이다"라고 적는다.

그처럼 나무를 절묘하게 표현한 작가도 없으리라. 나무도 인간처럼 땅에 뿌리를 박고 살며 하늘을 우러르는 생물이다. 인간은 하늘을 마음대로 만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함부로 다가갈 수도 없다. 반면에 나무는 하늘 가까이에 머물며 달과 별의 기척 소리도 신의 부름도 제일 먼저 듣고 보리라. 생텍쥐페리의 말처럼 하늘로 가는 길을 잇는 안내자가 바로 나무가 아닌가 싶다.

며칠 전 동살을 품은 느티나무에 매료된다. 설경 속 오창읍 학소리의 해 뜨는 절경을 담은 사진이다. 나무의 배경은 푸른빛이 감도는 하늘과 눈 쌓인 논바닥이 보이고 논둑 끝에서 태양이 막 떠오르기 전 광경이다. 그 중심에 둥치 큰 나목들이 서 있다. 더불어 우듬지에 까치집이 화룡점정처럼 정겹다. 헐벗은 나무들 가지가지 사이로 들어온 따스한 동살이 나무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작가의 미적 감각이 보는 사람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이은희 수필가·㈜대원 전무이사
이은희 수필가·㈜대원 전무이사

한겨울 빈숲의 나무들은 무언가를 품는데 일가견이 있다. 두 팔을 번쩍 올린 나뭇가지 틈새로 새벽 경계에 선 푸르스름한 동살과 붉은 노을을 품는다. 함박눈 내리는 날, 눈꽃 핀 나뭇가지는 또 어떠한가. 설경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세계로 데려온 듯 몽환적이다. 더욱이 밤길에 나무가 잇는 허공에 은하수가 물결처럼 흐르니 외롭지 않으리라. 온몸의 감각을 일으키며 수려한 언어와 문자를 낳는 나무가 바로 서정 시인이다.

나는 논둑에 서 있는 나무에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 그런데 자연은 인간에게 무한정 베풀고, 인간은 자연에서 대가없이 무언가를 얻는다. 갚을 길 없는 빚만 늘어간다. 우주가 하얗게 빛나는 새벽에 대가들의 글과 사진을 음미하며 가눌 길 없는 흥취를 가만가만히 가라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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