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유재풍 변호사

친구들과 한 달에 두어 번 주말산행을 즐긴다. 전국 100대 명산 순례에 이어, 괴산 35명산 탐방, 이어서 작년 봄부터는 충북 50명산을 탐방 중이다. '가고 싶은 산 충북 50선'이라는 책자를 길라잡이로 한 것이다. 이시종 지사께 출판을 건의해서 2019년 12월 충청북도에서 발간한 책이다. 책자에 실린 산 중 작년에 절반 정도 올랐다. 지난 주말은 괴산에서 가장 높은 백화산(1,063m)을 올랐다. 4년 전 100대 명산 순례 시에는 가까운 경북 문경 쪽에서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충북지역인 이화령 휴게소에서 출발했다.

다섯 명이 차 두 대로 나누어 갔는데, 원점회귀(原點回歸)할 생각으로 두 대 모두 이화령 휴게소 주차장에 세우고 출발했다. 편도 8㎞ 가까이 되는데, 흙길이어서 별로 힘들이지 않고 정상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세 시간 가까이 걸려 7㎞ 남짓 걸어서 정상을 1㎞ 정도 남겨둔 황학봉에 이르렀을 때 동행한 친구 중 하나인 박용희 원장(중의사, 건강원 운영)이, 아무래도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려면 힘들 테니 자기가 출발지로 돌아가 차를 운전해서 가까운 하산길 입구로 가겠다고 했다. 평소 같으면, 차 한 대는 출발지에, 다른 한 대는 도착지에 세워놓고 종주산행(縱走山行)을 했는데, 이날은 원점회귀 할 생각이어서, 그렇게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진행하다 보니, 코스가 길어서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는 것은 시간도 그렇고 지루할 것 같았다. 이를 감지한 그가, 정상을 코앞에 두고, 3시간 걸려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겠다는 거였다. 혼자서 그 먼 산길을 어떻게 돌아가느냐고 만류했다. 그런데도 전에 백화산 정상까지 가 봤으니 굳이 안 가도 된다며, 친구들 편의를 위해 지나온 길을 혼자 되돌아갔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작년 6월 진천 만뢰산을 종주할 때도 6~7㎞ 되는 산길을 혼자 되돌아가 차를 옮겨서 친구들을 편하게 했었다. 친구의 이런 따뜻한 배려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하산길은 지름길인 문경시 마원리 쪽을 택했다. 갈림길에서 마원리 표시가 된 비탈길로 내려왔다. 그런데 북쪽 사면이고 사람의 출입이 많지 않은 데다가 낙엽이 푹 쌓여 길이 거의 보이지 않고, 경사도 매우 가팔랐다. 나와 다른 친구 하나가 미끄러져 다칠 뻔하기도 했다. 겨우 멧돼지가 헤집어놓은 길을 따라 조금씩 조심스레 내려갔다. 그렇게 어렵사리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내려가는데, 저만치 전에 등산했던 이들이 매어놓은 리본이 하나둘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아주 오래되어 색이 바래 있고, 새겨져 있던 글자는 보이지 않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에 의지해서 간신히 하산할 수 있었다. 그런 길을 거의 2㎞ 이상 내려와서야 비로소 등산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주말산행을 시작한 지 10여 년 이상 지났지만, 이날처럼 앞에 간 등산객들이 묶어놓은 리본의 고마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단체산행을 와서 앞서가면서 뒤에 오는 동료들을 위해서 묶어놓을 수도 있다. 때로는 자기가 이 산에 왔다 간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기념으로 묶어놓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그 리본에 쓰인 글자는 다 바랬어도, 그 존재만으로도 후행자들에게 큰 길잡이가 되어 산행에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그 배려에 대해 우리 일행 모두 거듭거듭 감사하면서 하산했다.

유재풍 변호사
유재풍 변호사

동행한 친구들의 편의를 위해 정상을 눈앞에 두고 출발지로 고독한 회귀를 단행한 박 원장이나, 훗날의 산행자들을 위해 길 잃기 쉬운 곳에 리본을 매달아준 이들의 배려가,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이렇게 크고 작은 배려가 세상을 살맛 나게 해준다. 거창한 구호가 아닌 실천하는 배려가 감동 주고 감사하게 한다. 이런 이들이 있는 한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다. 하산길 등산로에 버려진 페트병 하나와 우유 팩 하나를 배낭에 집어넣었다. 받은 사랑과 배려, 나도 조금이나마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