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강전섭 수필가·청주문화원장

사월이다. 세상이 온통 싱그러운 연둣빛으로 가득하다. 이때쯤 새잎은 강물에 반짝이는 윤슬처럼 빛난다. 그 속에서도 지난 계절의 낡음과 우울함을 떨쳐내는 연노랑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노랑이 긍정과 부정을 함께 품으며 희망과 활기를 불어넣는다. 자르르한 봄볕과 가장 흡사한 색감이기에 더욱 그런가 보다.

봄은 색채의 마술사다. 봄의 기운이 스친 대지는 노랑연두로 시작하여 연두, 풀색, 녹색, 초록, 청록으로 변해간다. 칙칙한 회색빛이 연두색으로 변하는 뜨락에 노랑 물결이 일렁거린다. 찬란함을 품은 노랑은 태양을 상징하는 신성한 색이다. 봄바람이 불 때마다 정원 위에 노란 꽃물결이 마법처럼 번진다. 노란 꽃잎들이 봄날을 노랗게 물들이며 환하게 세상을 밝힌다.

이끼 낀 돌확 아래도 노란 꽃잎이 일렁인다. 가냘픈 긴 꽃대궁에 매달린 꽃잎이 황금종 모양이다. 위나 옆에서 보면 깔때기처럼 보인다. 나팔처럼 생긴 길쭉한 관에서 금방이라도 연주 소리를 낼 듯하다. 앙증맞은 화관 안을 자세히 보면, 투명한 여인네 속치마 같다. 긴 암술 한 개와 여러 개의 수술은 눈부신 각선미를 가진 아가씨의 다리처럼 매혹적이다. 어쩜 색상이나 모양새가 이리도 신비로울까.

노랑꽃은 골든벨 수선화다. 꽃잎은 여섯 개로 나팔 모양의 긴 부화관(副花冠)을 지닌다. 눈부신 연노랑으로 치장한 초미니 수선화의 위용은 당차 보인다. 귀여우면서도 나팔을 불며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어린 병정의 모습이다.

골든벨 수선화는 자아도취에 빠진 듯 유독 정원에서도 튄다. 눈을 삼삼하게 하는 여러 봄꽃과는 다른 묘한 풍경을 연출한다. 비슷한 시기에 피는 여타의 수선화는 고개를 들고 피다가도 만개를 하면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나팔 수선화는 필 때는 땅을 바라보다 완전히 개화하면 하늘을 바라본다.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잘난 체하는 치기 어린 모습도 엿보인다.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자란 부잣집 도련님처럼 겸손을 모르는 듯하다.

골든벨 수선화의 꽃말이 '자존심'이란다. 젊은 날의 우리는 이 꽃처럼 자신만만하고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었기에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다. 하지만 이러한 어엿함은 속절없는 세월 앞에 차츰 나약해졌다. 지금처럼 고달픈 세상에는 가끔은 작지만 자신만만한 수선화처럼 살고 싶다. 세파에 휘둘리지 않는 나만의 향기를 지니고 싶다.

강전섭 수필가·청주문화원장
강전섭 수필가·청주문화원장

울안의 봄꽃이 피고 진다. 오감을 자극하는 이 꽃도 머잖아 스러지리라. 또 새로운 꽃이 피어나면, 금세 그 존재를 잊으리라.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임을 꽃은 알기나 할까. 식물에서 숨어 있는 고수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처럼 영원함은 없다.

아름다운 봄꽃이 나를 돌아보게 한다. 골든벨 수선화의 모습을 보며 겸손과 동행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우리네 삶은 경주가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여행길이다. 살아가는 인생길에 자신이 흔들릴 때마다 다잡아주는 들꽃처럼 향기로운 동무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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