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은희 ㈜대원 전무이사·수필가

능선이 수평선처럼 기다랗게 누워 있다. 길옆에는 마른 억새와 새싹들이 푸릇하다. 당신이 그 길을 향하여 걸어간다. 언덕 저 너머에 무엇이 나타날까 궁금하다. 그런데 당신은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지 점점 걸음이 빨라지는 듯하다. 급기야 길 위에 까만 소실점으로 보인다. 당신의 여린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느라 어물거리다 멀어진 탓이다. 순간 그 거리감이 무섭게 다가온다. 주위에 슬픈 생명력을 상징하는 만물이 현현한다. 겨울과 봄의 경계지점에서 당신을 잃어버릴까 두려운 기운마저 든다. 언덕 너머로 사라지기 전에 어서 당신의 손을 잡아야만 한다.

당신은 전화로 '이 시기에 꼭 보여 줄 것이 있다'고 말한다. 수화기 저 너머에 계신 선생님과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약간 흥분된 억양에서 봄빛이 묻어난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전이되어 선생님에게 가지고 갈 봉송을 싸느라 분주해진다. 당신이 부르는데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기행 일정을 바꿔 달려간다. 선생님이 수렛골에서 신도시로 이사 나온 지 여러 달, 찾아뵙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 몸을 이끌었던가. 아니, 당신과 함께할 미래의 시간을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귀한 말씀을 듣는 시간이 얼마나 주어질지 모르고, 무엇보다 선생님 작품 속 진원지를 찾아가는 길이라 의미가 깊을 것 같아서다.

우리를 목계나루 억새 군락지로 이끈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진풍경이다. 메마른 억새는 바람의 부재로 소리 없이 누워있다. 대지는 어느새 푸른 새싹들을 밀어 올린다. 어미 억새를 바닥에 사정없이 누이고 솟아오르는 새싹들의 몸짓에서 비장한 기운마저 감돈다. 며칠만 지나도 마른 억새는 감쪽같이 사라지리라. 아니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지도 모른다. 인간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어김없이 순행하는 식물 앞에서 가슴에 통증이 인다.

어디 그뿐이랴. 여우비가 흩날리는 소리의 섬 풍경도 남다르다. 먹구름 아래 강물의 흐름은 더욱 선명하다. 두 발로 디딘 강돌들이 대부분 동글동글하다. 얼마나 억세게 굴렀으면, 각진 돌이 반들반들 동그래졌으랴. 강물에서 노닐던 자갈을 아니 무구한 세월을 두 발로 자근자근 읽는다. 무수한 상처와 고통에도 세상의 불평불만이 없이 자리한다. 강돌은 말없이 수행하는 수도승이거나 침묵의 신일지도 모른다. 봄은 유구히 흐르는 강물 앞에서 슬픈 생명력으로 다가온다.

이은희 수필가·㈜대원 전무이사
이은희 수필가·㈜대원 전무이사

비내섬은 '슬픔의 성지(聖地)'만 같다. 계절을 둘로 나눌 수는 없는 일. 길 위에서 겨울이 시르죽고 봄이 깨어나는 신기로운 형상에 숙연하다. 마른 풀을 누이고 솟아오른 새싹과 지상에 온몸을 드러낸 강돌에 서글픈 경배를 올린다. 당신은 머지않은 날에 인간도 식물의 순환처럼 자연에 귀의한다는 걸 알리려고 부른 것일까. 밀란 쿤데라의 구절처럼 인생이란,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당신이 걸어가는 봄의 능선은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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