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진순 수필가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할 일도 많은데 반갑지 않은 태풍소식과 비가 온종일 줄기차게 내린다.

봄부터 여름까지 애써 지은 농산물을 마지막 단계에서 제대로 갈무리하기 어렵다. 너무 습해서 곰팡이가 피고 싹이 트고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참깨와 고추 농사는 건조기가 있는 집은 걱정이 안 되지만 작은 소일거리로 농사를 짓는 집은 울상이다.

여름 내내 넘치게 열리던 토마토와 오이 넝쿨도 노랑 빛이 도는 것을 보니 이제 걷어야 될 것 같다.

울타리에 늙은 호박은 넉넉한 얼굴로 너털웃음을 보내고 조롱조롱 매달린 애호박이 다정스레 어께동무를 하고 있다. 우산을 쓰고 집안과 밖을 돌아본다. 선선해져서 생활하기는 수월하나 비가 원망스럽다.

정구지와 컴퓨리, 갯잎과 미나리 호박을 따 가지고 경로당으로 왔다. 감자를 까서 갈고 양파와 가지고 온 재료를 넣고 부침개 반죽을 한 양푼 해 놓았다.

부녀회장과 노인 회원들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하나둘 모이기 시작 했다. 임 여사는 전기 후라이판을 차려놓고 부침개를 부치고, 오총무와 부녀회장은 식탁에 초장을 만들어 따끈따끈한 부침개를 어르신들 앞으로 갖다 드렸다. 왁자지껄 사람냄새가 나기 시작 했다.

우리 문암 경로당은 우수 경로당으로 표창을 받은바 있다. 매주 월요일 3시면 구구 팔팔 강사가 와서 어르신들 건강관리는 물론 치매를 예방 하는 각종 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지도를 해준다. 아침밥을 먹고 어딘가를 갈 때가 있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요, 여럿이 함께 무엇이던 나눈다는 것은 기쁨을 불러온다.

코로나로 경로당 문이 잠긴 후 우리 마을에는 변화가 생기기 시작 했다. 독거노인들은 하루 세끼 밥을 해결하기 힘들어 주간 보호 센터로 출근을 하는가 하면 우두커니 방에서 징역살이 하다 주간 보호센터 다니는 분의 권유에 솔깃해져서 따라가는 분이 열 손가락을 꼽을 만큼 수가 늘어가는 실정이다.

이제 그나마 거동이 원활한 어르신들이 경로당으로 오시는데 반갑지 않은 코로나가 호시탐탐 비상령을 내리게 만드니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실정이다.

동사무소나 보건소에서는 방역을 수시로 점검하며 보살피고 시니어 클럽에서 철저한 위생 교육을 시켜 식사 도우미를 파견 시킨다. 매일 경로당 관리를 임원들이 하지만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한 양푼의 빈대떡은 어르신들 얼굴을 환하게 만들고 있다. 어르신들은 명절을 앞에 두고 지난날 시집살이 했던 곤곤했던 이야기를 신명나게 하고 계시다.

새집에 사니 문 바를 걱정이 사라졌다는 분도 있고, 놋그릇 닦고, 거미줄 걷어내며 시집살이 했던 때가 그래도 좋았다는 분도 있다. 여러 식구 아옹다옹 싸우며 배곯고 산 서러운 일들이 저리도 많았을까. 애기 낳고 몸조리도 못하고 모심었던 추억담은 여러 사람들을 눈물 짓게 했다.

나이를 먹으면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6.25 전쟁 직후 세상이 가난해서 대부분 대가족이 함께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가보다.

여자는 시집을 오면 시부모 섬기고 시누이, 시동생을 아가씨, 도련님으로 부르며 사셨던 어르신들이 80세를 훌쩍 넘고 있다.

70년대에는 보건소에서 둘만 낳아 잘 기르자며 가족계획을 홍보하러 다녔고, 식생활 개선을 앞장서지 않았던가.

세상은 참으로 빠르게 변하더라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이 갔다. 산 증인들이 지금 이 방안에 계시지 않는가. 우리는 그 세월을 넘나 들며 살았던 것 같다. 그토록 귀했던 화장지와 종이를 마음껏 쓸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얼마 던지 손자 손녀들이 쓰고 버리는 크래파스와 색연필이 있어 그릴 수 있다.

이진순 수필가
이진순 수필가

이 좋은 시절에 너무 험한 일을 많이 해서 아픈 허리와 다리에 통증으로 휘둘림을 당하고 계시는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다.

임 여사가 부쳐주는 빈대떡은 인기 만점이다. 비오는 날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리며 기름 냄새는 어르신들 사이로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