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경구 아동문학가

난 이런저런 이유로 버리는 것을 잘 못한다.

책을 읽다보면 오랫동안 쓰지 않는 것은 버려야 한다고 하지만 잘 안 된다. 몇 번 실행을 해서 나름 잘 한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보면 그렇지 않다. 그러다 보니 이곳저곳에 넣어 둔 잡동사니들이 많다.

아주 아주 가끔은 숨은그림찾기처럼 물건을 찾는 행복도 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노트다. 그럴 때면 더 찾는 것을 멈추고 어떤 게 써져 있는지 넘겨본다.

라디오 구성작가와 한 코너에 참여할 때 쓴 글이다. 차를 마시면서 좋은 글귀가 생각나거나 책을 보다가 좋은 부분이 있으면 옮겨 쓴 것이다.

일을 하며 짬짬이 생각나는 걸 적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지금이야 휴대폰에도 메모가 가능하지만 그땐 좋아하는 나만의 노트에다 적는 게 좋았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노트를 산다. 잘 쓰지 않으면서 예쁜 노트를 보면 그냥 사게 된다. 그래서 노트가 정말 많다. 크고 작은 것, 굵고 얇은 것, 독특한 디자인 등 다양하다.

그래서 기분 전환할 겸 새로운 글을 쓸 때면 일단 새 노트를 골라 가지고 다닌다. 그러면서 생각나는 걸 짧게 스케치하듯 쓴다. 그림 같은 낙서도 옆에 곁들이면서.

그런데 얼마 전 무엇인가 찾다가 1992년도 쯤 열심히 쓴 네 권의 노트를 발견했다. 중요한 것은 글씨였다. 동화를 쓰기 위해 나름 여러 가지 표현을 글로 써 놓거나 직접 쓴 짧은 동화였다.

아주 얇은 펜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 한 자 얼마나 꼼꼼하게 잘 썼는지 모른다. 내가 쓴 글씨 중에 최고로 잘 썼다.

그리고 틀린 글자가 하나도 없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아마도 정성을 담뿍 담았던 것 같다. 글씨가 아주 반듯했다. 지금의 내 글씨랑 정말 다르다. 예전 글자를 대나무에 비교한다면 지금의 글씨는 지렁이다. 바쁘게 산다는 이유로 글씨도 빨리 써야 했나보다.

요즘 노트의 내 글씨는 나도 알아보기 힘들 때가 있다. 예쁜 노트도 내 글씨를 보고 실망했을 것 같다. 예전 내 글씨들은 '글씨를 더 못 쓰네. 이상해.'라며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새해마다 올해는 글씨를 반듯하게 잘 쓰자, 라고 다짐을 한다. 하지만 며칠 못가 또 무너지고 만다.

그런데 버리지 못하는 노트 중에 보물 같은 게 한 권 있다. 그 노트의 상표는 지금은 없다. 중학교 때 소위 잘 나가던 중학생용 명품(?) 노트다. 대회에 나가면 상품으로 받기도 하던 노트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은 고등학교 때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보면 볼품이 없지만 그 시절을 생생이 기억나게 해 주는 귀한 노트다. 아마도 상품으로 받아 아껴두다 21살 정도에 사용한 듯싶다. 21살의 내 이야기들이, 동화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보물이 된 셈이다.

김경구 아동문학가
김경구 아동문학가

금은보화 보물은 없어도 노트와 글씨체를 통한 그 시절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그 어떤 것보다 귀할 수밖에. 앞으로도 멈출 수 없는 노트 사랑은 계속 될 것 같다.

아, 올 가을부터라도 글씨는 좀 더 반듯하게 써야겠다. 천천히 글씨를 쓰는 느림으로 가을을 좀 더 오래 느끼고 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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