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윤희 수필

아침저녁 삽상한 바람결이 대문 밖으로 불러낸다. 한여름 중단했던 걷기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바람이 달다. 한낮 따끈한 햇살도 곱다. 곡식을 여물리느라 혼신을 다하는 까닭이다. 인연 따라 훌쩍 보강천 미루나무 숲으로 발걸음을 했다. 미끈한 몸맵시, 헌헌장부다. 가지가지 꽃들이 다소곳이 피어 있는 것도 그의 눈길을 의식해서인가? 열없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머문다.

꽃길 사이를 걸어 산책로 따라 한 바퀴 돌아오니 마음에 꽃물이 든다. 정갈하고 신선한 공원이다. 나무 그늘에 앉아 냇물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한 잔에 평온이 깃든다. 증평은 진천과 이웃인 연고도 있지만, 수필로 맺은 인연 덕에 자주 찾는다. 올 때마다 기분이 산뜻해진다. 어디 미루나무 숲뿐이랴. 도로를 사이로 마주 보이는 증평군립도서관과 김득신문학관이 나란히 연계하여 이 또한 사람을 끌어들인다. 그곳에 가면 마음에 살이 오른다.

오밀조밀 꾸민 연못에 물레방아가 돈다. 기억 속에 머물던 펌프가 턱 하니 추억을 소환한다. 책 지붕을 인 '억만재' 정자 쉼터도 돋보인다. 쉼터가 책이고, 책이 쉼이다. 특히 귀엽고 코믹한 캐릭터는 발상의 전환이다. 안동김씨 명문가인 김득신 머리에 갓 대신 책을 씌웠다. 둥근테 안경을, 검은 선글라스를 씌웠다. 짓궂고 장난스런 친구로 만들었다. 아이들이 부모의 손을 잡아끌고 오게 했다.

김득신이 어떤 사람인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문인 아닌가.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의 손자요. 경상도 관찰사 김치의 아들이다.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둔해진 머리로 꾸준히 읽고 또 읽는 노력을 거듭하여 대기만성의 대명사로 꼽힌다. 오늘날 독서왕, 시인, 평론가로 평가를 받기까지, 전설 같은 그의 일화는 절로 훈육이 되기에 충분하다.

문학관으로 들어서면 김득신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일대기가 만화로 표현되기도 했고, 거북이를 형상화한 도표를 통해 표현되었다. 느리지만 끝까지 노력하여 성과를 얻는다는 메시지다. 2층은 문예배움터와 백곡사랑방 공간이, 3층은 기획전시실과 취묵당 카페가 있다. 카페 이름은 그가 말년에 소일하던 괴산 괴강가의 취묵당에서 따온 듯하다.

백곡 김득신은 진천과도 인연이 깊다. 백곡저수지 '식파정' 정자의 '식파정기'와 식파정 시가 전한다. 그의 호'백곡'은 내 고향 이름과 같아 괜스레 정이 더 간다.

고은 시집 "만인보"에 전하는 '책귀신' 일부를 읊조려본다.

사기 '백이'편을 11만 3천 번 읽었다/서재 이름을 억만재라 하였다/책 일만독 미만은 말하지 않았다/마누라 상중에도/곡에 맞춰 백이편을 읽었다//

억만재 주인/억만 번 읽는 것이 사명이었다/눈이 책을 뚫었다/책마다 구멍이 뚫렸다고/세상 사람들이 말하였다/책귀신이라고/세상 사람들이 말하였다//

김윤희 수필가
김윤희 수필가

1662년 현종 3년/그 책귀신이/나이 쉰아홉에 문과급제하였다/젊은 날/번번이 낙방한 뒤/체념한 뒤/책을 읽었다/책을 읽었다/읽고 읽었다// 이하 생략

저서로는 시문집인 "백곡집"과 가전소설 "환백장군전" "청풍선생전"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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