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경영 수필가

타임머신을 타고 20여 년 전 홍안의 미소년을 만났다. 열세 살 소년이 서른 넘어 다시 만난 것이다. 반듯하고 건실한 모습 속에 어릴 적 앳된 모습이 그대로 들어있었다. 아주 특별한 인연의 끈이 우리를 연결해 주었다.

영재들의 배움터인 과학 고등학교 문학 시간이었다. 출석을 점검하며 학생들 이름을 부르던 중, 동명이인(同名異人) 학생을 가르쳤던 이야기를 했다. 지금 초등교사가 되어 어디선가 또 다른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학생이 하는 말이, 그분이 초등학교 때 자기 담임선생님 같다는 것이다.

" 그래? 만약 네 추측이 맞는다면 그 선생님께 나의 안부를 전해주고 내게 연락하라."고 했다. 세상에 똑같은 이름이 얼마나 많은데, 아니면 말고 하는 마음으로 말한 것이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학생과 만나고 헤어졌다. 교실 문을 열면 훅 들어오는 땀 냄새 가득한 네모난 공간은 언제나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에너지 넘치는 사춘기 소년들에게 한 칸 교실은 너무나 좁은 곳이다. 유리창이 깨지고 칠판에 구멍이 나는 등 다양한 욕구 분출이 엉뚱한 곳에서 터지는 건 예삿일이다. 그런데도 시끌벅적한 교실에서 조용히 책 읽기에 푹 빠져있거나 따듯한 감성의 글을 쓰는 소년이 있다. 매시간 칠판을 닦고 분필을 포장해 가지런히 놓아두고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학생도 있다. 선생님께 귀염받고 인정받고 싶어 무엇이든 열심히 앞장서는 아이들도 제법 있었다. 지금쯤 아기 아빠들이 되었을 그 소년들 얼굴이 영화 필름처럼 스쳐 지나간다.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사람 되라 가르치며 열정을 다하던 눈부시게 푸른 내 젊은 날이 그 속에 모두 들어있다.

오른쪽 창가 뒤에서 두 번째 자리에 진한 눈썹의 선한 눈빛을 반짝이며 호기심 가득한 소년이 앉아 있다. 무엇인가 꼭 이루어야겠다는 다부진 모습이었다. 나비처럼 다가와 벌처럼 쏘듯 학습에 대한 열정과 질문을 쏟아내던 학생이다. 착하고 성실한 그 모범생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래된 제자 인사드립니다. 최근에 저와 이름이 같은 제자를 통해 선생님 소식을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현재 제자가, 과거의 제자이자 그 학생의 담임교사였던 저를 다시 이어주었습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이렇게 시간이 흘렀네요. 중학교 때 선생님을 만나 좋은 추억만 가득하게 행복한 1년을 보냈습니다. 진로교육원이 된 옛 교사(校舍)를 지나칠 때면, 소년 시절 풋풋한 추억을 떠올리곤 했답니다. 저는 괴산의 시골 초등학교에서 다음 세대를 책임질 어린 제자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빠른 시간내에 얼굴 뵙고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

이경영 수필가
이경영 수필가

그가 내게로 왔다. 사제지간(師弟之間) 만남은 끝없이 수다가 펼쳐지는 참새방앗간이다. 켜켜이 쌓여 있던 20년 세월을 풀어 놓으며 설레고 흥분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제자 선생님의 고백이다. "국어 시간 선생님의 릴레이 읽기 수업 방식을 제가 지금 따라 하고 있어요. 박하사탕을 나눠주시던 달콤한 추억과 100점 맞은 학생들에게 밥을 사주셨던 따듯한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지요." 배움과 가르침의 선한 영향력은 그렇게 시나브로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 인생길에 서로를 기억하며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두는 것이 있다는 건 진정 행복한 일이 다. 타임머신은 젊은 시절의 나와 10대 소년이 다시 만나 애틋한 정(情)을 나눌 수 있게 해 준 잠시 멈춘 고장난 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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