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시선 수필가·음성고 교장

아, 가을이다. 여름 내내 뜨거웠던 열기는 어디론지 사라지고, 그 푸르렀던 나뭇잎도 빛이 바래 낙하를 준비하고 있다. 미호강 산책길에 뻣뻣하게 올라왔던 갈대는 푹 고개를 떨구고, 억새는 은빛으로 살랑살랑 바람 춤을 추고 있다.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다. 무엇이든 물들고 떠나고 비우는 계절이다. 그러나 가을은 새로움을 준비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농부는 결실을 거두어 창고에 쌓아두고 다음 농사를 기약한다. 나도 마찬가지. 그동안 배운 바를 벼리고 매조지어 잘 마무리해야 한다. 그래야 온전히 내 것이 되기에.

가을 길을 걸으며 사색에 젖는다. 불현듯, 일본 작가 나카무라 미츠루가 말했다는'인생은 곱셈이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멋글씨를 쓰는 작가나 인터넷 공간에서 이 말이 많이 활용되고 있었다. 한마디로,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어떤 기회가 와도 소용없다는 뜻이다. 사칙연산 중에 곱셈을 인생에 비유한 것이 참으로 기발하고 놀랍다. 그렇다. 덧셈은 숫자가 0이어도 뭔가를 더하면 그만큼 늘어난다. 그런데 곱셈은 숫자가 0이면, 여기다 무슨 수를 곱해도 0이다. 그냥 제로가 된다. 내 삶이 그랬다. 나는 하늘만 보이는 시골에 태어나 정말 막막했다. 중학교 다닐 무렵 어렴풋이 깨달은 앞으로의 삶! 그건 뭔가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공부였다. 죽어라 공부하는 것, 이것만이 내가 살 길이라는 것을. 이 한 생각은 지금껏 살아온 내 인생 경전에 올려도 손색이 없다.

논어 위령공편 9장에 이런 말이 나온다. 자공이 대뜸 공자에게, 어떻게 하면 어진 사람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이에 공자는, 장인이 일을 잘하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자기 연장을 예리하게 갈 듯이, 현명한 사람을 섬기고 어진 사람을 벗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해준다. 정말 기막힌 말이다. 자공은 공자의 제자로 언어에 뛰어나 외교에 능할 뿐 아니라, 든든한 재력가로도 유명하다. 공자 학단의 재정을 뒷받침한 사람이 바로 자공이었다. 자공이 이렇게 된 것은 바로 공자의 이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인이 일하기 전에 먼저 자기의 연장을 예리하게 하듯이, 훌륭한 사람이 되려거든 먼저 네가 준비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현명하고 어진 사람을 찾아가서 열심히 배우는 것이다! 정말 멋진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공자는 결국'인생은 곱셈이다.'라는 말을 벌써 2,500여 전에 한 셈이다. 불가에는'인연생기'라는 말이 있다. 인연이 없으면 그 어떤 것도 생기고 일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가을에 물드는 것도 다 시절 인연 덕분이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되니 이렇게 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계절마다 치열하고도 분주한 준비가 있었다는 사실! 만일 여름이 그토록 뜨겁지 않았다면 가을은 절대 올 수 없었다. 모든 인연이 곱해져서 풍성한 가을이 된 것이다.

최시선 수필가·음성고 교장
최시선 수필가·음성고 교장

가을 길을 걸으며 생각한다. 저 온몸으로 춤추며 서걱이는 갈대를 보라. 내가 가지고 있는 연장은 무엇일까. 앞으로 어떤 인연을 지어갈까. 순간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었다가 바람에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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