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옥 수필가

가을이 깊어 있다.

단풍잎이 내리고 은행잎도 내려앉은 길을 따라 걷는다.

수분이 날아가버린 잎들은 바스락거리며 가을을 이야기한다. 이번 생 또한 아름다웠다고.

싹을 틔우고 잎을 키우고 녹음으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절정을 지나 또한번 아름답게 불붙는 열정으로 생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나는 이 가을에 두 사람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무더웠던 여름도 시원한 바람에 밀려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던 가을의 초입에서 시어머님과 이별을 했다. 요즘은 그래도 아흔은 넘겨야 조금은 덜 아쉽다 말 하는데 어머님은 아흔을 마저 채우지 못하시고 여든아홉의 연세로, 7년 전 먼저 가신 아버님 곁으로 떠나가셨다.

결혼해서 서른두 해를 사는 동안 어머님의 큰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어머님은 늘 조용조용 말씀하셨고 인자로웠다. 지극히 상투적이라 생각이 들겠지만 실제로 그러하셨다. 자식들이 엄마의 뜻대로 따라주지 않을 때 회초리부터 들었던 친정어머니와는 사뭇 다르셨다. 자식들의 뜻을 항상 존중했고 늘 자식들을 위해 양보하셨다. 물론 그 결과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어서 지금도 아쉬운 점이 많기는 하지만 늘 조용히 그렇게 사셨다. 부모님과의 이별은 누구에게나 회한을 남기기 마련인지라 아쉽고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오는 이별이기에 더이상 아픔 없는 또다른 세상으로의 떠남을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한다.

어머님을 떠나보낸 후 난 또 한 번의 이별을 감당해야 했다.

아직은 영원한 이별을 하기엔 이르디이른 큰형부와의 작별이다.

육남매의 맏이에게로 장가를 온 우리 큰형부는 언제나 유쾌했고 사람좋다는 말이 딱 알맞는 분이셨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였던 형부는 처가의 가족을 친형제, 자매 이상으로 좋아했고 맏사위로서 집안의 대소사를 다 주관해 주셨다. 내가 중학교에 갓입학했을 때 언니와 결혼 했으니 거의 50여 년을 가족으로 지낸 셈이다. 친언니보다도 형부를 더 따르고 좋아할 정도였으니 유난히 가족 우애가 좋은 친정은 그게 모두 큰형부 덕분이라고 말한다. 은행원으로 정년퇴직 후 편안하고 즐거운 노후를 꿈꾸었던 형부를 우리는 코로나로 잃었다. 본인도 알지 못했던 지병이 코로나의 침투로 한순간에 퍼져버렸고 허망하게 작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으로 생각하는 건 아픔의 고통 없이 응급실 입원 후 이틀 만에 운명을 달리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위안을 삼으며 마음을 달래보는 가을날의 이별이다.

김영옥 수필가
김영옥 수필가

십일월의 한낮에 만나는 머리 큰 맨드라미들, 꽃잎 바래가는 백일홍, 과꽃, 밭둑에 무리지어 피어있는 십일월의 금잔화들, 고개숙인 십일월의 해바라기들, 모두 이별을 준비하고 있어 애잔하다. 그러나 그들은 영근 씨앗으로 내년 봄, 여름을 위해 익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내가 이 가을에 맞이하는 두 번의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스스로 깊이 익어가기로 한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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