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윤희 수필가

들녘이 훤하다. 화려하게 물들었던 단풍이 하나둘 내려앉기 시작한다. 모두 겨우살이 준비에 들어가는 거다. 그동안 맡아 오고 있는 일들을 하나하나 마무리를 하는 과정에서 문득문득 묵직하게 신경을 잡아끄는 것이 있다. 김장이다. 시절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한 해의 갈무리는 역시 김장이다. 숙제가 한 짐이다. 내게는 그 어떤 문제보다 어렵다. 먹을 만큼 절임배추를 사서 양념만 만들어 넣으면 좀 수월할 수 있는데 부득부득 배추를 심는다.

남편은 정년퇴직 후 이것저것 심어 가꾸는데 골몰한다. 어지간히 재미있는 모양이다. 손바닥만 한 밭뙈기에 오만가지를 심어 놓고 새벽부터 일을 나간다. 해가 중천에 오르면 들어온다. 때를 놓쳐가며 일할 때도 있다. 나는 곡식 심어 가꾸는 재미를 모른다. 밭에 나가보지도 않은 주제에 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 할 형편도 못 된다. 모르는 척하는 것이 상책이다. 밭에서 거두어들이는 수확물보다 그나마 일이라고 붙들고 있는 것이 더 고마운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남편은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하면 몸살을 앓는다. 무가 얼까, 배추가 얼까. 시어머니가 마뜩잖은 며느리 대하듯 들며 날며 구시렁댄다. 추워지기 전에 뽑아서 김장을 하면 무에 문제랴. 하지만 내가 맡은 일 역시 마무리를 해야 하는 시기가 딱 그 무렵이니 집안일이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올해도 여전히 배추를 심었다. 못하게 할 수는 없고, 제발 20포기 이상은 심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많이 심어야 감당을 못하는 걸 뻔히 아는 터라 조금만 심는다고 했다. 한 소리 듣기 전에 김장부터 해야겠다 싶어 다 저녁때 남편을 앞세워 밭으로 향했다. 한 아름이나 돼 보이는 배추가 도도하다. 재빨리 포기를 세었다. 25포기다. 많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다. 그로서는 최대한 줄여 심은 걸 게다. 무는 셀 수가 없다. 역시 많다.

배추 밑동을 향을 칼을 들이댔다. 푸짐하게 제 몸을 살찌운 녀석이 시퍼렇게 날을 세워 반항이다. 제 눈에도 어설픈 주부가 만만해 뵈는 모양이다. 결국 남편의 손에 의해 잘렸다. 옆에서 겉잎을 떼어내고 차에 실었다. 무를 보니 못생긴 여자 다리를 보고 '무다리'라 한 뜻을 알만하다. 당근은 더 가관이다. 웃음이 터진다. 매끄럽게 생긴 게 하나도 없다. 몽탕한 데다 갈갈이 골진 것이 당근을 모르는 이가 보면 '이것이 뭣 하는 물건인고' 했을 게다. 골파를 뽑고, 갓을 잘랐다. 모질다. 아무려면 어떠랴. 맛만 제대로 내면 되지 싶었다.

아침을 먹자마자 마당에 앉아 포기를 쪼개려 했다. 어찌나 속을 단단히 채웠는지 칼집을 낼 수가 없다. 속을 열지 않으려 앙칼지게 웅크리고 맞선다. 친정 올케가 와 보더니 20포기만 하라 한다. 난 거기서 5포기를 더 빼돌렸다. 15포기로 낙찰이다. 커다란 고무통에 소금물을 진하게 풀어 머리부터 들이밀었다. 짠물을 옴팡 뒤집어쓰고서야 찔끔한다. 언니가 이파리를 벌리며 사이사이 소금을 흠씬 뿌려 넣었다.

거실로 들어와 속 재료를 준비했다. 채칼로 무를 채 치고, 갓과 골파도 손가락 반 정도 길이로 썰었다. 남편이 생강과 마늘을 찧어 주었다. 큼지막한 고무 함지에 썰어놓은 재료와 고춧가루, 새우젓, 멸치액젓 매실액 등 갖은 양념거리를 넣고 버무려 놓으니 흐벅지다. 매콤한 틈으로 단내가 솔솔 풍긴다.

마당 샘가로 와서 절여놓은 배추를 보니 서슬 퍼런 콧대가 납작해져 엎드려 있다. 처분대로 하라는 거다. 물기를 빼고 들여와 켜켜로 속을 집어넣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어쩔 줄 모른다. 짜고, 맵고, 단, 세상에서 올곧게 한 성질 하는 것에 80이 넘은 올케언니의 투박한 손끝이 마음을 합치고 나서니 기세등등하던 놈이 머리를 조아린다. 김치통 속으로 고분고분 들어앉는다. 불쑥불쑥 고개 들고 성깔을 부리면 여지없이 소금 세례다.

김윤희 수필가
김윤희 수필가

여덟 통의 겨울 뒷갈망이 흐뭇하다. 혼자서는 어림없는 일을 하루에 끝냈다. 어설프다 얕잡아보고 반항하던 녀석을 한방에 때려눕힌 기분이다. 든든하다. 겨울, 이제 걱정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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