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오계자 소설가

세속의 소리일랑 저만치 밀어두고 맑은 물소리 가득한 낭음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 먼 옛날 고산이 띄운 청정한

마음 한자락 같은 시편들은 오늘 우리가 받는 귀한 선물입니다.



보길도 세연정에서 고산 윤선도님의 작품을 둘러보다가 접한 맨트다. 병자호란 때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에 울분을 참지 못한 그분은 세상이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제주도로 향하다가 보길도의 풍광에 반해서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 세속을 잊으려 마음을 다듬으며 쓴 시편들이 '어부사시사' 같은 훌륭한 시 문학을 탄생시켰다.

주변 산세가 연꽃을 닮았다 하여 부용동이라 하고 섬의 주봉인 격자봉 아래 낙서재를 지어 거처를 마련했다는 기록이다. 그분이 산봉우리나 바위등에 붙인 이름들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집을 지어 '곡수당'이라 하는가하면 산중턱에 집을 지은 '동천석실'은 내부가 비좁아 여유롭자눈 못하지만 집 나온 입장아닌가. 혼자서 기거하기엔 좋은 듯하다. 예부터 서양은 집을 지을 때 내부 시설이 중요하지만 우리는 주변 경관을 더 중요시 했다고 한다. 동천 석실에서 문만 열면 탁 트인 산야가 3년묵은 체기마저 내려갈 것처럼 후련하다. 이런 곳에서 하루만이라도 묵고싶다

그분을 두고 세상에 살되 세상에 갇히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다. 끝없는 하늘을 대붕(하루에 9만리를 난다는 상상의 새)처럼 날고 싶었으리라고 한다. 내가 보기엔 원없이 세속을 초월한 경지에서 거칠 것 없는 자유인으로 살았던 것 같다. 한없이 부럽다. 나도 딱 그렇게 살고 싶어 조금씩 내려놓으려 노력하다가 덜컥 세상짐을 짊어지고 말았다. 피할 수 없이 이렇게 되었으니 몇 년 더 우리말 공부를 하자는 다짐을 했다.

그분은 주로 한문으로 수학하던 유교세상에서 어쩌면 그렇게 우리말을 아름답게 다듬어 엮어냈을까. 고산 윤선도 본인의 머리도 가슴도 더없이 맑고 청정하니까 엮어놓는 시편마다 아름답고 순수하리라 생각한다.

잠시 부용동의 원림을 산책하면서 휴대폰을 들고 온 것을 후회했다. 저질 정치판에 뉴스를 만든다?는 뉴스공장에다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 사실인양 대정부질문석에 오물을 뿌리는 뉴스가 싫어서 폰조차 두고 다니는 경우가 잦아진다. 당쟁으로 어지럽던 그시대 고산의 심정이 이랬을까, 그렇다. 이런 심정이었으리라.

정치적으로 열세인 남인 가문에 태어났지만 집권세략에 강력하게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물론 타고난 용기와 머릿속 지식이 우선이지만 벼슬을 하지않아도 삶에 지장이 없는 든든한 재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까 유배생활과 은거 중에도 의식주는 화려했고 생활에 걱정 없으니 타고난 문학적 기질을 거침 없이 살릴 수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맑고 고운 언어를 엮어 아름답게 구성해서 자연과 잘 조화되는 시들이다.

그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은 이러한 생활 환경 속에서 표출됐다.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 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것은 그가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조상이 물려준 유산을 토대로 풍족한 삶만을 누렸기 때문이다. 얼마전 내가 아픔은 문학의 마중물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분의 아픔은 나라의 아픔이다.

오계자 수필가
오계자 소설가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歌人)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백과 사전에서)

우리는 그의 아름다운 시를 선물받은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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