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모임득 수필가

꽃도 사람도 시절인연이다. 꽃이 지천으로 피어있어도 내가 보지 않으면 꽃이 아니다. 꽃도 사람처럼 그저 피는 꽃은 없다.

친구네 정원에서 수세미에 이끌린다. 사진을 찍으려고 허리 구부리다 작고 앙증맞은 꽃을 발견한다. 오후 세 시 무렵 피어나니 세시 꽃이다. 다닥다닥 붙은 꽃송이와 씨앗들이 참 귀엽다. 누가 바라보지 않아도 세시가 되면 다섯 장의 꽃잎을 열었다가 저녁이 되면 오므린다. 꽃이 지는 것이 섧을 새도 없이 봉오리도 많고 달린 씨방도 많다.

작은 진분홍빛 꽃은 금방 나의 마음을 끌었다. 한 줄기 얻어다 심었는데 그 후로 피고 진단다. 나는 왜 이제야 보았을까. 여러 송이가 피어 눈길을 사로잡는 봉숭아, 백일홍 같은 꽃만 눈에 든 것이다.

세시에 핀다고 세시화, 자금성꽃, 목안개꽃으로 불린다. 곁가지 사이사이에서 계속 꽃을 피운다. 주고 또 주는 친구처럼 화수분이다. 씨앗도 계속 따기가 무섭게 여문다. 동글동글 씨도 익으면 하얗게 변한다. 그걸 똑 따면 까만 씨들이 들어있다. 건드릴 때마다 씨앗이 여기저기 막 튄다.

4월부터 11월까지 꽃이 피고 진단다. 꽃봉오리는 왜 하필 오후 세시 경에 열까. 사람의 인생으로 치면 오후 3시는 딱 내 나이일까.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가라앉은 시간, 강렬하게 내리쬐는 한낮의 태양도 좋지만 한 꺼풀 힘이 사그라진 세시의 빛이 좋아질 나이다. 한창 열정적인 시간은 가고 이제 느긋하게 노을을 보며 차 한 잔 여유 부릴 나이로 가는 시간이다. 청춘을 지나 노년으로 접어드는 시간에 꽃이 피다니. 참으로 신기하다.

'식물학의 시조'라고 불리는 식물학자 칼 폰 린네는 하루 동안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을 기록해 꽃시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 피어있는 꽃과 피어있지 않은 꽃들을 대조하여 지금 시간이 대략 몇 시쯤인지 파악할 수 있는 자연 시계이다. 꽃들마다 봉오리가 벌어지는 시간과 오므리는 시간이 다르므로 이를 이용하여 시간을 알 수 있었던 건데, 린네의 꽃시계에 3시쯤엔 무슨 꽃이 피었을까. 세시화도 추가해야 할 듯하다.

하루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어 어느덧 육십이다. 하루는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되돌아보면 그 하루가 모여 이 자리에 닿은 것이다.

힘든 시간을 보내서일까. 마음이 나약해져선가. 5년여 병시중에 몸도 마음도 지친 데다 혼자서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데, 망설이게 된다. 거친 세상에 한 발 내디뎌야 하는데 주춤거리고 있다.

내 인생 9시경일 때는 빠른 판단과 행동도 거침없었다. 세상 두려운 것이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이룰 것만 같았던 패기가 있었다. 그 패기가 무모함이 세상과 부딪히면서 적당히 타협하고 조율하며 여기까지 왔다. 딱 세시화가 피는 시간까지.

세시화 주인인 친구와는 너나들이하는 사이다. 조용한 듯하면서도 내가 푸념하는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공감해주며 해답을 주기도 한다. 성품이 넉넉하고 도량이 넓다. 남편들이 친한 친구였는데, 나의 반쪽이 간 지금은 부인들이 더 친해졌다. 일생에 마음 나눌 친구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성공한 삶이라고 하는데, 그럼 난 성공한 인생이리라.

정이 그립고 관심을 받고 싶고 누군가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내 인생을 의논하고 싶다면 주저 없이 친구한테 간다. 남편이 가고 세상 밖으로 한 발 디디기가 힘들었을 때 손잡아 주었고, 언제 만나도 반갑고 고마운 친구다. 좋은 시절보다 내 처지가 곤궁하고 어려울 때 함께 하는 친구가 참다운 벗이다. 친구와의 우정에도 깊이가 있다. 세시화를 품은 벗은 내 개인적인 일이나 불안정한 감정을 드러내어도 흉이 되지 않는 친구다.

모임득
모임득

눈에 보이지 않는 씨앗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싹을 틔워 꽃을 피울까. 여리디여린 듯 하늘하늘하면서도 절대 쓰러지지 않는다. 물을 주면 바닥에 쓰러졌다 다시 일어난단다. 나보다 더 씩씩한 화초 같다. 친구도 나도 세시화 피는 오후 세 시 인생을 지나고 있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 다섯 시를 지나고 저물녘 노을을 맞이하는 길에 같이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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