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영희 수필가

지난 3일 오전(한국시간) 카타르 알라이얀의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H조 3차전 대한민국과 포르투갈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며 16강 진출에 성공한 대표팀이 기뻐하며 그라운드를 달리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3일 오전(한국시간) 카타르 알라이얀의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H조 3차전 대한민국과 포르투갈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며 16강 진출에 성공한 대표팀이 기뻐하며 그라운드를 달리고 있다. /연합뉴스

정중동(靜中動)의 계절 겨울이다.

마음을 가다듬는 한해의 끄트머리라서 12월을 매듭 달이라 한다니 순우리말이 참 곱고 참신하다는 생각이 든다. 체념의 메시지가 편안하게 전해져오고 이제는 모두 수용하고 관용의 묘를 보일 시기임을 알려주는 듯하다. 이때쯤이면 올해의 낱말을 뽑는다. 영국의 콜린스 사전은 영구적 위기란 뜻의 Permacrisis를 선정해서 사전에 올렸다고 한다. 코로나가 지구촌을 점령하고 한 쪽에선 전쟁과 지진이 일어나며 경제는 곤두박질을 치고 있으니.

달랑 남은 달력 한 장을 보면서 '아니 벌써'라고 했는데 어느새 오늘이 며칠이던가. 아무리 독한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입에 올리기 민망한 참사가 일어나도 세월은 물처럼 태연하게 흘러가는데 사람들이 한 해라는 매듭을 만들었나 싶기도 하다. 이렇게 조금은 권태로울 때 월드컵 포르투갈 전은 온 국민을 하나 되게 하고 환희에 차게 했다. 태극기에 쓰인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문구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게임에서 처음 사용한 문구라는데 젊은이들은 '중 꺽 마'라고 한다. 젊은이들의 이런 신조어가 거슬리기보다 열정과 불굴의 투지로 보인다.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마음의 위력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역전 골을 넣었을 때는 신바람으로 아파트가 흔들거릴 지경이었다. 어려울 때 스포츠만큼 국민을 결집하는 게 있던가.

두 마음이 합치면 더 따듯해지는 이때 이종사촌 동생이 결혼을 알리기에 혼수품 미리 준비했느냐며 농담했다. 12월은 하나가 될 두 사람이 달리기 라인에서 신호가 울리기를 기다리는 때이고, 1월은 본격적으로 튀어 나가 달려야 해서 이달에 하기로 했다나.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나오려 했지만 지혜로워서 잘 살거라 덕담하고 나니 동창 모임이다. 코로나 예방주사를 맞고 식사를 못 하는 친구가 생각나 입맛이 날 만한 반찬을 몇 가지 담아 갔다. 그날 한 명이 나오지 못해 전해줄 작은 선물 하나가 헝겊 가방에 남았는데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그 가방에 한 번 더 넣어서 건넸다. 집에 온 후에야 생각이 났다. 젊었을 때는 분명하고 정확한 것을 우선시했으니 바로 전화해서 확인했을 것이나 그까짓 것 없으면 다시 사서 주어야지 하며 기다리기로 했다.아니나 다를까. 며칠이 지난 후 친구가 바로 알려줄 걸 깜빡했다며 전화했다.

박경리 선생의 "아아 편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던 옛날의 그 집 마지막 시구를 떠올리며 공감하는 순간이었다. 급한 마음에 확인했더라면 몸도 성치 않은 친구 마음에 금이 가서 서운한 매듭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모처럼 느긋하게 여유로운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면서도 형체가 없는 마음을 의도한 대로 선하게 이끌어 가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고정관념은 나이에 비례하는데 어떤 결정이 그런 시각으로 굳어진 것을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며 산책하는데 황금빛 화려한 옷을 모두 벗어버린 은행나무 밑에서 은행알을 까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는 제 열매가 익었다고 말하지 않지만, 그것을 따 먹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든다는 뜻의 도리불언(桃李不言)과 같은 이치이리라.

이영희 수필가
이영희 수필가

꺾이지 않는 마음을 잘못 생각해 무작정 욕심을 부린다면 근심이 생겨 불안할 것이다. 마음 편하고 몸 건강한 것이 행복일진대…

텅 비고 깨끗한 거울처럼 투명하게 볼 수는 없지만, 선입견이나 편견을 버린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평형을 유지해야겠다. 세찬 비바람이나 눈보라에 미동도 하지 않고 봄을 기다리는 태연자약한 나목의 기품을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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