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순덕 수필가

암투병 중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밥 먹자. 그래 먹자. 태우러 간다. 오케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만으로는 환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씩씩하다. 통화 후 십 분도 채 되지 않아서 친구가 누르는 자동차 클락숀 소리가 들린다. 기다리게 하지 않고 바로 나와 주어서 고맙다는 친구의 말을 받으며 차에 올랐다. 병원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생각나서 전화했다는 친구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눌러쓴 모자 사이로 삐져나오던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는다.

나 열심히 살았어. 그래 알아.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담담하게 내뱉는 그녀의 독백에 눈이 마주치자 피식 씁쓸하게 새어 나온 웃음들이 부딪혀 허공에서 사라졌다.

살다 보면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부득이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것으로 인한 상실의 두려움은 절망을 가져오기도 한다. 절망의 밑바닥을 치고 올라오면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과 타협하며 다시 살아가는 힘을 얻기도 하는데 친구는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 많은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삶에 대한 달관과 죽음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나타낸 작품인 '귀천'은 자신이 하늘에서 왔으니 생명이 다하면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하며 이 세상을 소풍에 비유한 시다.

"어차피 누구나 돌아가야 할 길인데, 나도 남아있는 인생 소풍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즐기기로 했어. 너와 마주 앉아 있는 지금 이 시간도 소풍길에 찾은 보물 찾기의 일부라고 생각하니 참 감사할 뿐이야"

한 줄의 시구(詩句)가 눈에 보이고 입에 걸리는 날 세상을 달리 보게 되고 살아갈 힘을 얻었다는 친구의 말에 얼마 전에 우연히 만났던 아주머니가 생각났다.

00슈퍼라는 간판이 무색하게 먼지 묻은 잡동사니 몇 개 놓여있는 점포 앞에서 더덕을 까는 아주머니를 만난 것은 내가 몹시 지쳐 있을 때였다. 그동안 지나온 시간들이 문득 내 몸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엇으로 보상을 해 줄까 이리저리 생각하던 중에 새소리 바람소리 들리는 숲 속에서 숲멍에 빠져 보기로 했다. 불멍도 물멍도 아닌 숲에서 멍-때리기.

문경새재 3관문으로 올라가는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느긋하게 아름다운 길 새재를 향해 오르려는데 진한 더덕 향이 발길을 잡는다. 아주머니의 손끝에서 뽀얀 모습으로 벗겨진 더덕을 맛보기로 건네받아 먹어보니 달다. 한 봉지 사가고 싶은데 현금이 없다는 나의 말에 아주머니는 집에 가서 송금해 주면 된다고 한다.

처음 보는 사람을 뭘 믿고 그러냐는 나의 질문에 사람이 사람을 안 믿으면 뭘 믿어야 하느냐고 되묻는다. 아주머니의 시원스러운 말씀 속에 사람 사는 정이 느껴져 몇 마디 더 주고받다가 아예 주저앉아 버렸다. 이럴 때, 일행 없이 하는 혼자만의 여행은 동행한 사람의 시간을 배려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가 있어서 좋다.

아주머니의 고향은 전라도 광주라고 한다. 친정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새 장가를 들면서 아이가 태어났고 그 아이를 보살피는 것이 자신의 몫이 되자 집을 나왔다고 한다. 무작정 수안보로 시집간 언니가 있는 곳으로 와서 어린 나이에 이곳에 정착하게 된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끊기는 쉽지 않았다. 돌아가신 내 어머니도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셨지….. 생각하니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도 복 짓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찍이 장사에 눈을 뜬 아주머니는 문경새재를 찾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슈퍼와 함께 식당을 운영하면서 사 남매를 키웠다고 한다. 특히 슈퍼에서 팔던 기념품 중에는 '공부할 때 고통은 잠깐이지만 못 배운 고통은 평생이다'라는 문구가 있었다고 한다. 인생의 나침반이 된 명언을 만난 아주머니는 억척같이 사 남매를 교육시키며 만나는 학생들에게 이 말을 의무처럼 전하였다고 한다.

김순덕 수필가
김순덕 수필가

삶의 고비마다 빛이 되었던 명언의 힘은 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도 자양분이 되는 짧지만 강렬한 명언이 있는데, 그것이 내게는 최고의 명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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