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이은희 ㈜대원 전무이사·수필가

떠나오길 잘했다. 꽃 멀미가 나도록 동백숲에서 노닐었으니 신선이 따로 없다. 묵직한 머릿속이 맑아지며 소녀 시절로 돌아간 듯 설레기까지 한다. '동백꽃 여행'도, 여고 시절 지음知音과 수다도 즐겁다. 이렇게 함박웃음을 지어본 적이 언제인가. 최근에 많이 웃어본 기억이 없다. 친구들이 무엇을 하든 어떤 행동 하든 시도 때도 없이 웃음보가 터진다. 역시 오랜 벗이 좋다.

과감한 일탈이다. 직장에서 12월은 처리할 일이 많은 달이다. 자리를 비운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 삶에 직장 일도 지음과 함께하는 시간도 소중하다. 두 가지의 선택을 놓고 갈등 끝에 나를 합리화한다. '만약 내가 내일 죽는다면, 어디로 향할 것인가'라고. 혹자는 무얼 그리 극단적인 질문을 하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의 삶은 그만큼 욕망을 자제하며 살아온 터다. 아니 열아홉부터 지금껏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치열하게 살아온 생生이다. 평소처럼 직장에 정주할 것인지,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날 것인지 결단 내려야만 한다. 결정의 막바지에 다다른 것이다. 어쩌랴. 영혼의 무게는 시소가 한쪽으로 기울 듯 친구들에게 조금 더 기울어져 있다.

생애 갈등의 상황이 어디 이번뿐이랴. 사회생활 그 자체가 갈등 속이었는지도, 아니 딸부잣집 맏이로 태어난 그 순간부터일지도 모른다. 지리멸렬한 갈등의 지속은 성향 탓이기도 하다. 나는 다중채널 진행이 어려운 사람이고 멀티형의 성향이 아니다. 하나에 꽂히면 끝장을 보아야 하는, 한 우물을 어기차게 파는 성격 탓이다. 아니면 정주형에 가까워서 그런가. 대부분 쉽게 결정하는 사안을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그걸 알기에 반복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속사정을 모르는 지인은 나의 일솜씨가 좋다고 말하는데, 나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일을 마칠 때까지 조바심의 중량을 어찌 수적으로 표현하랴. 일을 잘하기보단 부족한 면이 드러날까 바장이며 점검하는 소심 형의 결과이다.

이번에도 예매한 항공 티켓을 바라보며 구구절절 가지 못할 이유를 늘어놓는다. 그러다가 나에게 묻는다. 왜, 자신만을 위하여 영혼이 시키는 대로 결정을 못 내리는가. 남보다 욕망이 높아선가. 아니다. 나는 소중한 사람을 위하여 지켜야 할 것이 많아서다. 자기 절제가 강하여 가끔은 회의적일 때도 있다. 이제 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어서니 내적 갈등의 도道가 트였던가. 그래, 몽테뉴는 '나의 영혼이 삶의 주인이자,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다.'라고 적었다. 일단 떠나라고 권유한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지 않는 곳으로.

오늘도 관리 본능이 꿈틀거린다. 단체로 움직이는 여행이기에 지각하는 친구가 생길까 염려가 되는 거다. 그걸 대비하여 출근길 러시아워 현상과 일찍 오는 친구들에게 커피를 준비하겠다고 문자를 남긴다. 조직에서 구성원을 챙기는 일상이 몸에 밴 습관 탓이다. 제일 먼저 공항에 나가 친구들을 기다리며 내가 남긴 문자를 바라보며 참 오지랖이 넓다고 생각하며 헛웃음을 짓는다. 사람의 성향을 단번에 바꿀 수가 없나 보다. 성향을 바꾸려면, 아마도 살아온 세월만큼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이번 여행에서는 친구가 하자는 대로 나를 편안히 놓아두기로 다짐한다.

이은희 수필가·㈜대원 전무이사
이은희 수필가·㈜대원 전무이사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행간을 뛰어넘지 못하는 영혼이다. 그럼에 고인 물에서 벗어나기다. 일탈, 잠시 숨을 고르는 여유가 소중하다. 무시로 내 영혼이 원하는 자리에 닿고 싶다. 머무는 자리가 여행지든, 직장이든, 서재든, 어디든 상관없다. 진정으로 원하는 자리에는 생명력 넘치는 자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혼이 시르죽어가지 않도록 머물 공간을 살필 일이다. 자신에게로 시선 돌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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