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진순 수필가

내 집 앞 눈을 쓸었다. 경로당 가는 길을 넉가래로 길을 내고 있다. 주머니에 핸드폰을 꺼내 마을 톡 방에 들어갔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마을 사람들을 깨울까. 물음표를 던졌다. 그리고는 꾸욱 참았다. 젊은이들 이니까,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새벽 일찍 가마솥에 물 한 솥을 데워 놓고는 어머니를 깨워 조반을 짓게 하셨다며 자랑을 하셨다. 아랫목이 따듯해지면 우리는 깊은 잠속으로 빠져 들었다. 정말 일어나기 싫은 겨울 아침이었다. 그 깊은 사랑이 깃든 가정은 늘 평화가 깃든 행복한 시간이었다.

책임감이란 무섭다. 통장이 눈을 쓸면서 나오고 마을 총무가 나와서 함께 눈을 쓸었다. 집집마다 대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하나둘 비와 넉가래를 들고 나왔다. 염화칼슘을 뿌리고 시끌벅적 눈 쓰는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커피포트에 따끈한 물 한주전자와 커피를 들고 신작로로 나왔다. 따끈한 커피 한잔씩을 안기니 꽁꽁 언 손을 커피 잔이 녹여주고 있다.

어떤 일이든지 혼자 하는 것 보다는 둘이 하는 것이 힘들지 않으며 이렇게 힘을 모으니 골목이 훤하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스한 김이 사랑의 정으로 하늘로 피어오른다.

테크노 단지 조성으로 민둥산이 되어 버린 산천을 하얀 눈이 덮어 버렸다. 회색빛의 산 까치가 내려앉더니 까치와 까마귀 떼가 흰 눈 위로 날아든다. 병풍처럼 뒷동산에 소나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츄리를 연상시키고 저 멀리 무심천 변에 설경이 곱기만 하다.



1950년대 주거 환경은 토담집에 땔감도 변변치 않았다. 전쟁직후라 세상이 가난했던 때였다.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 부모님들은 눈밭을 뛰어 다니지 않으면 삼시 세끼 해결이 버거워 아침엔 밥, 점심엔 국수나 수제비, 저녁은 죽을 먹는 가정이 대부분이었다.

험한 일을 한 탓으로 발은 동상이 걸리고 손톱 밑이 갈라져 밤이면 송진이나 쇠기름을 정육점에서 얻어다 등잔불에 지지며 상처를 보듬었다. 물론 빈부의 차가 커 잘사는 가정도 있었다.

식구들이 지내기도 좁은 방 윗목에 콩나물을 시루에 길러서 찬으로 삼고, 콩을 맷돌에 갈아서 두부와 메밀묵을 만들었다. 얼마나 손이 많이 가고 힘든 작업인지 밤새우는 일을 밥 먹듯 해야 했다. 땔감이 넉넉지 않은 때라 남자들은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야 했다.

자식들 학비를 조달 하려고 밤새 만든 두부와 묵 콩나물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얼름판 길을 종종걸음으로 나서던 조상님들을 떠 올려 보라. 그렇게 우리들의 학비를 마련하여 공부를 가르치셨다. 지금도 부모님을 생각하면 눈에 무지개가 선다.

그 뜻을 받든 자손들이 있어 눈부신 발전으로 살기 좋은 대한민국은 선진국 대열에 서서 너나없이 잘살고 있지 아니한가.

17년 만에 내린 폭설이라고 한다. 아마도 특수 작물을 하는 농가는 비닐하우스가 무너질까 노심초사 밤샘을 했을 것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은 성당이나 교회가 조용하다. 자비와 사랑이 교회 안에만 멈추고 있는지 호화로운 츄리도 보이지 않는다. 년 말이 가까웠지만 구세군은 북적 거리는 곳에나 있는 듯하다.

자비와 사랑이 거리로 나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어야 하지만 자비와 사랑은 교회와 절간에 머물러 교회당과 절간만 커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왕에 만들어진 "츄리"라면 만인이 바라보도록 성당이나 교회 앞마당에 세워 졌으면 얼마나 세상이 밝아 보이고 아름다웠을까.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아 모여라"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 날 만큼은 따끈한 밥 과 국 한 그릇 나누며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는 곳 어디에 없을까.

이진순 수필가
이진순 수필가

나는 진정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을 만큼 어려운 사람인가,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성찰 해볼 때가 아닌가 싶다. 독거노인, 기초 수급자, 노령 연금 수령자 중에는 실질적으로 부끄러운 부자들이 꽤 있다.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할 때 진정한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평화로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새해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가정에 훈훈한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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