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종완 위로&소통연구소

한 해를 마무리하고 시작하는 방식으로 시간의 가치를 곱씹는다. 문득문득 인생사를 품고 있는 시간의 무게감을 절실하게 실감한다. 시간은 일상의 에피소드를 잉태하고 삶의 발자취를 추억으로 소환한다. 나는 사방팔방이 산으로 에워 쌓인 오지 시골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시골에서만이 경험할 수 있는 놀이에 대한 추억들이 많은데 유독 감에 얽힌 추억이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는 유년기에 새벽녘쯤 떨어진 홍시를 남이 주워갈까 염려해서 서둘러 광주리를 들고 집을 나섰다. 부모님이 감을 주워오라고 시키지 않았는데도 한 입 먹었을 때 느꼈던 달콤한 맛과 줍는 재미가 쏠쏠해서 홍시를 주웠다. 감나무 밑에는 대개 들깨가 심어져 있었는데 들깻잎을 스칠 때마다 독특한 향이 후각을 자극했고, 그 때 경험했던 들깻잎 향에 대한 좋지 않은 느낌 때문인지 줄곧 깻잎을 좋아하지 않는다. 홍시를 줍기 위해 발걸음을 이리저리 옮길 때마다 들깨 잎에 묻어있던 이슬방울이 떨어져 무릎 아래의 바지를 적셨고 한기가 느껴졌다. 언젠가 들었던 P의 이야기가 나의 어릴 적 감에 얽힌 추억을 생경하게 떠올리게 했다.

P는 엄마가 담근 김장김치를 주신다고 해서 친정집에 들렀고, 점심을 사드리려고 이동하는 중에 차 안에서 엄마가 느닷없이 감 이야기를 꺼내셨단다. P의 친정집 정원에는 40년 이상 된 단감나무가 있다고 했다. 네 자매 중 둘째였던 P의 막내 여동생도 김장김치를 갖다 먹기 위해 친정집에 들렀던 모양이다. 막내 여동생이 "손을 뻗으면 딸 수 있을 만큼 야트막한 가지에 달려있는 감을 왜 안 따고 남겨놓고 있느냐"물었고, 엄마가 "둘째 언니 오면 따 주려고 남겨 놓았다. 감을 따지 않고 며칠 더 두면 감이 더 커지고 당도가 더 좋아진다."고 답했단다. 엄마가 막내 여동생이 무심한 듯 그냥 웃더라는 말을 전할 때에는 신이 나있는 느낌마저 들었다고 했다.

P는 엄마가 막내 여동생과 얽힌 감 이야기를 굳이 두 번씩이나 꺼내 전하는데 이해가 안 되면서 불편한 감정까지 올라왔다고 했다. 막내 여동생이 엄마의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넘겼다고는 했지만 둘째 언니만 챙겨준다는 편애가 느껴져 시기심과 질투심이 자극되어 씁쓸한 감정이 올라왔을 것이 짐작됐다고도 했다. 엄마의 처신에서 자매지간에 관계를 돈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간질을 시켜 갈등을 유발하고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어 멀어지게 하려는 무의식적인 역동이 작동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까지 들었다고 했다.

P는 엄마의 심리적인 기질이 자기애가 매우 강한 성향을 지닌 분이라고도 했다. 엄마는 매사를 자신의 뜻대로 하기 위해 자식들을 통제하고 조종하는데 일관했고, 자식들에게 정서적으로 따뜻한 애정과 친밀감을 주는 데는 인색했다고 했다. P는 엄마의 감 이야기를 들으며 엄마가 자신을 끔찍하게 아껴주고 애정을 듬뿍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엄마의 거짓된 마음과 이중 메시지가 느껴져 씁쓸했다고 했다. 막내 여동생에게는 너도 언니처럼 엄마의 애정을 받고 싶으면 엄마에게 더 잘하라고 하는 엄마의 사악한 의도가 무의식적으로 작동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아렸다고도 했다.

이종완 위로&소통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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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상황과 조건에 맞춰 감정을 속이기도 하고, 진짜 자신을 숨기고 가면을 바꿔 쓰며 살아간다. P는 어릴 적부터 엄마가 자신을 이용할 일이 있을 때만 잘해주고 위해주는 척하며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행동을 취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예순이 될 즈음에서야 하게 되었고, 이런 깨달음으로 엄마와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고 했다. P는 엄마가 자신을 진짜로 위한다면 막내 여동생이 감에 대해 물어 봤을 때 "나중에 편하게 하나씩 따먹으려고 한다."며 에둘러 말하는 것이 어미의 마음이고 진정성 있는 마음의 표현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말끝에 "미성숙한 사람과 맺는 불편하고 서먹서먹한 관계는 땡감의 떫은맛을 연상시키고, 성숙한 사람과 맺는 편안하고 돈독한 관계는 홍시의 달콤한 맛을 연상시킨다."고 했던 P의 말이 오래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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