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기 전 충북학교육연구원장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아 부자간에 늘 서먹서먹했던 아버지가 보고 싶다.손 마디 마디 굵은 주름이 생기고, 갈라진 발바닥에 피가 맺혔을 때도 가슴으로만 삭이시던 아버지…. 괜찮다 손사래 치며 웃어 보이고 이만하면 다행이다 돌아서서 눈물만 훔치셨다.

"힘든 세상에 태어나 이 어려운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기 참 다행이라꼬."

영화'국제시장'주인공 덕수씨 말이다. 가슴 절절한 아버지의 고백이자 굴곡진 삶을 이야기 한다. 남녀노소 국적을 불문하고 가족을 위해 고생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언제나 마음을 사로잡는다. 평생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는 우리 시대의 아버지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제 몸을 희생하는 가시고기가 생각났다. 그리고 그 사랑 위에 내 아버지의 삶이 겹쳐졌다.

 아버지 일과는 늘 동트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부엌에서 나뭇간에 쌓인 나뭇단을 풀어 불을 지피고 소죽을 끓이시는 거다. 무쇠 가마솥이 소리를 내며 눈물을 흘리면 솥뚜껑을 열고 여물에 등겨를 얹어 휘저어서 구유에 담아준다. 주먹만 한 눈을 둥글리며 맛있게 먹는 우리 집 재산 1호 누렁이를 바라보며 흐뭇해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어깨너머로 보였다. 

 무더운 여름날이면 누렁이가 냄새 날까 봐 방죽에 가서 목욕을 시켜주었고, 새 지푸라기로 외양간 바닥을 깔아 주셨다."오늘 개운 하겠구나!"혼잣말을 하며 당신도 우물가로 가서 등목을 하셨다. 

 아침 식사를 하다가도 소가 여물을 먹지 않으면 "저놈의 소 새끼 왜 저러고 있는 거야!"속상해하며 소리치셨다. 그리고는 잡숫던 국에 밥을 말아 구유에   부어주셨다. 앉으나 서나 누렁이를 든든해 하셨다. 새끼를 낳으면 자식을 보듯 좋아 함박 웃음꽃이 피었다. 잘 키워 장에 내다 팔면 돈이 되는 가난한 농가의 유일한 수입원이었기 때문이다. 

논밭을 갈기 위해 쟁기를 지게에 지고 소를 몰고 갈 때는 친구가 된다.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면서 흥얼거리던 농부가의 구성진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쟁기로 밭을 갈 때면 호흡이 척척 맞는다."이럴루우!"하면 오른쪽으로 가고 절러루우!"하면 왼쪽으로 간다."이랴! 이랴아!"하면 소의 걸음이 빨라지고,"워,워"하면 멈춘다. 단 몇마디로 서로 통하는 거다. 

 꼴을 베어 한 짐 잔뜩 외양간 앞에 쏟아 놓으면 큰 입을 벌려 혀로 감싸  어금니로 갈아 먹는다. 그리고 밤늦도록 곰곰이 되새김질을 한다. 그 모습을  기쁘게 바라보시는 것을 보면 서로에게 감사한 마음이 교감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추수할 때는 누렇게 익은 볏단과 보릿단을 소등에 얹어 나르셨다. 외양간 누렁이는 아버지의 친구요 애인이요 가족이었다.

 단벌 바지와 러닝셔츠로 한여름을 지내면 무릎은 헤져 너덜너덜해진다. 발가락이 삐져나온 양말을 신은 아버지를 보면 마음이 아팠다. 어머니께서 천을 대고 수도 없이 꿰매준 아버지의 옷은 장날 품바의 모습 같았다. 누더기 옷을 입은 채 손이 시려 호호 불면서도, 아들이 비에 젖을까 눈 맞을까 걱정이셨다. 알뜰살뜰 모은 돈으로 운동화를 사서 신기고, 털장갑을 끼워 주시던 아버지였다. 

 누나가 시집갈 무렵에는 솜이불을 해주려고 목화밭을 만드셨다. 쌍고개 고추밭에 고추가 주렁주렁 달리면 붉게 익은 것을 따서 포대에 담고, 5일장에 나가  팔아서 학비를 마련하셨다.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시장통 그 흔한 국밥 한 그릇 못 사 먹고 돌아서신 아버지…. 통학 버스가 뿌옇게 먼지를 일으키며 황톳길을 달려오는 저녁이면, 그제서야 아픈 허리를 펴신다. 혹여 아들이 오는가 서녘 해를 손으로 가리고 바라보는 아버지의 기다림은 무언의 사랑이었다. 자신의 전부를 내어 주셨던 아버지야말로 가시고기 사랑이었다. 

 어느덧 나도 작은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돋보기를 써야 하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자녀들을 출가시키고 손주들 재롱에 행복을 느끼며 산다. 꼬물꼬물 자라나는 손주들을 보면 입안에 있던 것도 꺼내주고 싶다."잘살아보세!" 노래하며 가난과 배고픔을 이겨냈다. 오직 가정과 자녀만을 위해 살아왔던 인생  뒤안길을 바라본다. 속 빈 강정 같은 헛헛함을 느끼며 아버지의 마음이 내 안에 들어온다.

 

김영기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김영기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땐 무덤가를 찾는다. 양지 녘에 할미꽃이 가지런하다. 자줏빛 융단 같은 속살 녹여 자손을 번성시키느라 머리가 하얗게 센 모습으로 나를 맞는다. 목젖으로 뜨거운 액체를 삼키며 봉분의 잔디를 짚어 본다.

 "너도 힘들었지? 잘했다. 잘하고 있다."

 하시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출렁출렁 가슴으로 흘러든다. 당신에게서 받은 사랑 끝내 갚지 못하고, 내 사랑의 강은 다시 자식에게로 향하는 내리사랑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강이 되어 흐르고 또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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