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한식 수필가

"예, 어머님"

"그래, 잘 지내지?"

"이번 명절에 아이들하고 올라오기 힘들 테니 우리가 내려가마"

"어머님, 어쩌죠. 외할머니하고 약속이 있어서요."

안 보아도 표정이 선하다. '얘가 제 정신인가? 결혼하고 5년 만에 시부모가 처음으로 간다는데 뭐 약속이 있어 안 된다고…' 예상 못한 어이없는 반응에 어쩔 줄 모르며 괘씸하고 분해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니가 날을 잡아 연락하든지, 아니면 다음에 보자' 딸은 아무 생각 없이 이번에는 친정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전후 사정을 들은 엄마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어디 있느냐며 할머니와 약속을 미루고 시어른들을 오시도록 해 같이 한 끼를 드시도록 하라고 조언한다. 딸은 시어머니께 전화를 드려 외할머니와 약속을 취소했으니 그날 오시라고 했다. 이제는 음식이 걱정이다. 딸은 주변 좋은 식당을 알아보고 그리로 모실 생각이란다. 시어머니는 눈치를 채고 자신이 음식을 만들어 주겠다는 결심을 한다.

다시 딸에게 통화를 해 자신이 음식을 해줄 테니 그것으로 대접을 하라고 했다. 사돈 분들이 아시면 민망할 테니 다섯 살 난 외손녀 입단속이 문제라고 걱정이다. 하지만 민첩한 딸은 시어머님께 그 사실을 곧바로 알리면서 음식 걱정 마시고 내려오시라고 했단다.

이런 일을 겪으며 양쪽 집에서 적지 않은 염려를 했겠다 생각한다. 먼저 친정 쪽에서는 딸이 몰라도 그렇게 모르는가 싶었을 게다. 시부모님 어려운 걸 몰라도 분수가 있지, 그분들이 먼저 내려오신다는 걸 다른 약속이 있으니 안 된다는 것이나 친정 엄마가 음식을 해 준다고 아무 주저함 없이 드러내는 게 이해할 수 없다. 시어머니 편에서는 앞으로 며느리와 지낼 게 막막하리라. 이런 기본적인 것도 쉽게 거부당하면 맞추어 살기 정말 어렵고 시집살이가 아니라 며느리 살이를 겪지 않을까. 세월이 갈수록 당당해질 며느리 생각에 걱정이 태산일 게다.

처가에서 연락이 오기를 올해 명절은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먹고 따로 모이지는 않는단다. 몇 년 전부터 추석에는 아들들이 장모님을 모시고 국내 여행을 하더니 이제 여행을 가지 않아도 집에서 모이지 않고 식당에서 한 끼를 먹고 헤어지자는 게다. 할 일들이 많으니 이해한다. 함께 모이기도 해야 하지만 찾아뵈어야 할 처가도 있고 자식들이 챙겨야할 사돈댁들이 있으니 명절 하루에 시간분배가 쉽지 않을 게다. 더구나 모두가 바쁘니 음식을 장만하는 것도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오랜 세월 이어 오던 풍습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당연하던 것들이 전혀 당연하지 않다. 어머니 세대와 딸 세대가 한 공간에 살아도 사고방식이 전혀 다르다. 늘 자신들이 사는 시대를 과도기라 하겠지만 이 간극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결혼 초에 겪은 일이다. 아내가 내게 이불을 개라고 했다. '아니, 남편을 어떻게 보고 그런 일을 시킬 수 있을까?' 그런 건 당연히 아내가 할 일이고 내가 할 일은 따로 있는 것이지…' 말은 하지 않아도 무척 무시당한 느낌이었다. 내가 자라난 가정에서는 남자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한번은 아예 부엌일을 도와 달라고 했다. 부엌은 남자들이 드나드는 공간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으니 충격이었다.

지난해에 사위가 육아휴직을 내고 아이를 돌보았다. 육아는 아내의 일이지 남편이 그 일을 해야 하는가 했는데 사위는 불만은커녕 즐거움으로 일 년을 보내고 올해 다시 직장에 복귀했다. 금년은 딸이 다시 육아를 하고 내년은 또 사위가 한단다. 모를 일이다. 이제 시비를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물처럼 흐르는 변화를 어떻게 거스를 수 있을까. 여러 생각이 든다. 얼마가지 않아 명절 연휴는 그냥 쉬는 날이 되고 해외여행 가기 좋은 휴가로 굳어질지도 모르겠다. 되돌아보면 수천 년 천천히 흐르던 물결이 점차 빨라지더니 이제는 한해가 다르게 거스를 수 없는 속도로 휘몰아쳐 흐르고 있다. 한편으로 무척 두렵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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