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진순 수필가

정월 대보름이다. 며칠 전부터 저장해 두었던 나물을 삶았다. 시장만 가면 먹거리가 넘쳐나는 시대를 살다보니 정월 대보름 명절도 시들해져 간다.

배고픈 사람들이 많았던 보름 명절을 손꼽아 기다렸다. 달님에게 소원을 빌 떡을 하고 나물과 생선을 사다 음식을 장만했다.

어린 시절 정월 대보름날의 추억은 참 많다. 떠오르는 보름달을 향하여 떡시루 위에 정한수 한 그릇 올려놓고 한지에 소원을 적어 소지를 올리며 기도하시던 할머니 생각도 난다.

부모님 손을 잡고 쥐불놀이 구경을 나섰다. 들판엔 불꽃이 허공을 향해 울긋불긋 춤을 추며 날아 다녔다. 밤풍경은 황홀 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향우반) 활동으로 정월대보름 날은 노래자랑을 했다. 떼로 몰려다니며 큰 양푼을 들고 밥을 얻으러 호호방문 사립문을 열고 "밥을 달라고" 소리치면 떡이며 나물을 주셨다. 우리들은 그 밥을 친구 집에 모여 비벼 먹으며 웃음꽃을 피웠다.

오빠들은 복조리를 사다 실로 묵어 "복조리요" 하고 집집마다 울 넘어 앞마당을 향해 던졌다. 그것은 해 마다하는 행사였다. 다음날 쾡가리와 북 장구를 치며 복조리 값을 받으러 다녔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 뒤를 따르며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집집마다. 터를 다지고 새해 만복을 비는 의례를 우물과 터, 토광과 장독대를 향하여 천지신명께 빌어 주었다. 주인은 마당에 떡이며 전 달떡과 수수 복음이를 내오며 답례를 했다. 물론 복조리 값도 후하게 주셨다.

결혼을 하고 신혼살림을 까치 내(벌독정이) 들이 바라보이는 원평동에 둥지를 틀었다. 100여호 남짓한 마을 (김영덕)이장과 부녀회장(임영자)님을 중심으로 설빕으로 장만한 한복을 입고 풍물패를 구성 동네 한 바퀴를 돌고는 회관 앞마당에서 윷가락을 던졌다. 지나간 추억을 다시 꺼내보니 아름답기만 하다.

그중의 시댁과 친정집의 보름 명절은대조적이다. 캐톨릭 집안에서 자란 난 시댁의 토속신앙을 섬기는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이 들었다.

열나흘 날은 저녁을 일찍 먹는 날이라며 친정어머니는 9가지나물에 오곡밥을 지으시느라 분주하셨다. 여자는 종다리를 들고 들로 나가 미나리며 냉이를 캐라 이르셨고, 남자는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갔다. 고주박과 솔가루등 나무 9짐을 하는 날이라고 했다. 왜 9가지나물에 나무도 9짐을 하라 하셨을까.

그날은 김도 먹을 수 있고 고등어와 꽁치도 맛볼 수 있는 날이었다. 집에서 기르는 멍멍이도 시루떡을 물고 다녔다.

시어머니는 토속 신앙을 섬기시던 분이다. 콩나물과 숙주나물을 기르고 두부도 집에서 하셨다. 고사떡, 찰떡 무시루떡, 크고 작은 시루에 고사를 지낼 준비로 바쁘셨다. 아침부터 온종일 부엌에서 떡을 쪘다. 저녁나절까지 잔치 집처럼 바빴다. 장독대 부뜨막, 토광, 우물 외양간까지 집안 곳곳에 시루위에 냉수를 떠놓고 시어머니는 두 손을 합장 하시고 주문을 외시며 집안이 평안하고 자식이 잘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대가족에 종가집인 시댁은 늘 손님이 들고 났다. 손에 물마를 새 없이 상을 물리고 차려야 했으니까.

살림을 나고 작은 나만의 가정을 꾸리며 앞만 보고 살아온 세월은 더 없이 보람 있었다. 사는데 바빠서 여유를 즐기진 못했지만 순간순간을 참으로 열심히 후회 없이 살았다.

정월 명절이나 보름날에는 그냥 넘긴 날들은 없는 듯하다. 봄부터 저장해 말린 나물을 삶고 오곡을 넣어 찰밥을 해서 이른 저녁을 먹였다.

다음날 호두며 땅콩 밤을 사다 보름날 아침이면 부럼을 깨물고 온 식구들에게 귀밝이술로 입술을 축이게 했다. 어디 그 뿐인가 덕담을 주고 받으며 더위를 팔았다.

이진순 수필가
이진순 수필가

이제는 사방에 흩어져 사는 자식들의 안부를 확인 하는 걸로 만족을 한다. 이제 고희의 나이에 이르고 보니 경로당이 놀이터가 되었다.

마을 어르신들과 먹을 나물을 준비한다. 한 씨 부인이 가져온 찹쌀에 콩,팥, 다섯가지 색깔의 곡식을 넣어 밥을 짓는다.

오늘은 열나흘 보름명절이니 다모여서 "호호 하하" 지나간 추억담이나 나누며 놀아 보자고. 푼수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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