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한식 수필가

휴대전화에 모르는 번호로 부재중 전화가 와 있다. 그냥 넘어갈까 하다 "누구신가요?" 문자를 남겼더니 곧 댓글이 달렸다. 얼마 전 하늘나라로 가신 목사님의 아내분이시다. 무슨 대화를 하려는 것일까 대충 짐작이 간다. 대화의 방향을 잡아보려 하나 간단치 않다. 꾸물거리는 사이에 벌써 찾아오셨다.

예상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서두는 느낌이 온다. 내게 오시기 전에 다른 곳도 다녀왔단다. 피곤해 서로 핵심만 이야기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다. 많은 이들 일처리 방식이 마음에 차지 않으시나 보다. 상대하는 이들이 모두 당신보다 어린데, 아쉬운 소리를 하려니 쉽지 않을 게다. 남편 목사님을 이어 교회 일을 하려 하시는데 그에 따른 목회자들의 인준이 필요한 게다. 신학을 이수해 근본적 문제는 없지만 그분을 향한 심리적 저항이 있는 것 같다.

상대가 당황할 만큼 저돌적으로 서두르느라 여기저기 부딪치고 거친 게 드러나나 보다. 무엇보다 선입견이 중요하니 지금처럼 하시면 막무가내로 비칠 수 있다. 차라리 당신을 이해하는 분에게 부탁해 처리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조언을 해드렸다. 아마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게다. 젊은 시절부터 많은 일들을 대부분 그렇게 하셨으리라 짐작이 된다. 조금 무리가 있겠지만 밀어붙이는 게 익숙하고 효과적이라 믿으시는 듯하다.

크게 보아 그분 의견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판단한다. 개인적 감정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공적 영역까지 확장되어서는 곤란하다. 같은 상황이면 누가 어떤 이에게 의뢰해도 결과에 큰 차이가 없으면 좋겠다. 그 일을 위해 법과 규칙이 있고 상식과 합리가 힘을 갖는다. 일이 원리에 어긋나게 진행되면 무리가 따르고 서운함과 받아들임에 어려움이 있다.

부드럽게 적은 마찰로 일을 성취하려면 규칙을 따라 정해진 속도로 세심하게 진행해야 한다. 상대를 내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를 상대에게 맞추는 게 현명하다. 상황에 따라 긴 과정에 많은 인내를 요할 수 있다. 탈거리가 없으면 불이 꺼지듯 한쪽에서 피하고 숙이면 충돌을 줄일 수 있다. 목소리를 낮추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임해야 한다.

가장 피해야 할 것은 감정의 대립이다. 그것은 상황을 파국으로 몰아가고 일을 그르친다. 호흡을 고르고 부드럽게 시작하길 권한다. 때론 건조하게 감정을 배제하고 고치고 보충해야 할 것들을 알려주고 그 면들을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여 수정하고 채우는 과정을 밟아 가면 서로의 인격과 행동이 한 뼘쯤 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죽음의 순간까지 누구에게나 배울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잘 배우는 이가 잘 가르칠 수 있고 부드러움이 강함을 능히 제어한다. 유연하게 그런 일들을 이루어가며 경험이 쌓임으로 집단도 성장한다.

대나무의 성장을 멈춘 지점이 마디란다. 그곳에서는 성장이 아니라 기다리며 힘을 모은다. 그때 생기는 마디가 울퉁불퉁하고 보기에는 아름답지 않지만 대나무가 곧게 자랄 수 있는 힘을 갖게 해준다. 잘 받아들이면 고통 속에 은총이 있고 어둠 속에도 안식이 있다.

어떤 질병으로 오래 고생하다 벗어난 이들은 유사한 형편에 놓인 이들과 감정의 교류가 수월하고 그들을 더 잘 도울 수 있다. 어려움을 모르고 편안한 길로만 달려온 이들은 삶의 또 다른 면을 경함하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집에 머물렀던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은 배고픔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세상이 얼마나 만만치 않은 곳인지 모른다. 아버지와 함께 산다는 것의 평안함과 안락함은 맏아들보다 오히려 둘째 아들이 훨씬 잘 안다.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의 깨달음을 얻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디에 있든 성장의 기회는 늘 열려있다. 화가 변하여 복이 되고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온다. 오늘날 여러 곳에서 속도경쟁이 한창이다. 그렇지만 때로는 내가 원하는 속도가 아닌 자연의 빠르기대로 조금 느리게 가도 괜찮고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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