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최한식 수필가

며칠 전 저녁이었다. 내 방 책상 앞에서 책을 읽고 있었더니 저녁을 차려놨으니 먹으란다. 읽던 단락을 마저 끝내고 식탁에 앉았다. 비빔밥이다. 채소와 고추장이 어울려 보기 좋고 먹기에도 괜찮다. 요 며칠 아내는 감기와 몸살을 앓고 있다. 나를 빼고 둘째네 가정까지 돌아가며 감기로 고생이다. 이런 계제에 무딘 내가 언제 무얼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게 문제다.

비빔밥을 두어 숟갈 떴을까 하는데 아내가 아프면 죽을 좀 쑤어달라고 한 마디 한다. 그런 때는 얘기를 하라고 하니 알아서 해줘야지 꼭 말을 해야 하느냐고 했다. 내가 상황파악이 잘 안되니 죽을 끓여달라고 하면 되지 그게 뭐 그렇게 어려운 거냐고 했더니 보면 알지 그걸 꼭 말로 해야 하느냐며 말투가 달라진다. 아니, 말 한 마디 해서 분명히 하는 게 어려울 게 뭐냐고 내 목소리가 높아지니 저녁밥을 먹을 기분이 전혀 아니다.

숟가락을 놓고 내 방으로 왔다. 안됐는지 따라와 화해하려고 한 마디 한 게 또 거친 말싸움이 되고 말았다. 별 내용이 아닌 걸 가지고 그렇게 판까지 깨야 했는지 생각한다. 서로 자존심이 상했다는 증거다. 서로의 방으로 가서 각자의 일에 몰두하는 형세가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굳어진 내 대처방법이다. 어린 시절을 막내로 보낸 원 가정에서나 통하던 해결책을 변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사용하니 합리적 해결이 아니다. 한편은 문제의 상황에 적절한 해결책을 익히지 못해 몸이 먼저 익숙한 방향으로 향하는 게다. 비슷한 방법들로는 현장 떠나기, 물건 던지기, 음주나 흡연 같은 것들이 있을 텐데, 그중 가장 낫고 효과적이라 여겨 길들어 온 해결책이리라. 나이가 들어도 제대로 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갈등이 생길 때마다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배가 고프다. 한 끼 거른다고 문제가 생기거나 영양이 부족할 리도 없건만 길들여진 습관에 따른 몸의 느낌일 게다. 근래에 먹지 않았던 컵라면이 먹고 싶다. 허전한 느낌에 특정 음식을 먹고 싶다는 욕구가 겹치니 버티기 어렵다. 자주 체하는 내 체질에 이로울 게 없음을 알지만 아내가 챙겨주는 밥이 아니라도 내가 먹을 게 있다는 시위 성 심리도 한 몫 해 컵라면을 챙기고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그 유혹적인 음식을 먹었다. 입에 당기는 맛이 있고 배가 부르다. 느긋한 마음이 된다.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었다. 아내에게 가서 마음을 풀어주어야지 싶지만 별로 할 말이 없다. 아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게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새벽이 되었다. 일상의 과정대로 삶이 흘러간다. 오전 언제였을까? 아내가 내게 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평상의 상태로 다시 전환하자는 의도였을 게다.

그 말끝에 내가 먹지 않은 비빔밥을 화단에 가져다 쏟았는데 아침에 참새 몇 마리가 날아와 쪼아 먹고 있더란다. 아내가 지나가니 푸드덕 날아갔는데 다시 날아와 한 끼 식사를 했을 거란다.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새들에게 먹을 걸 준적이 없지만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한 셈이 되었으니 새들이 사정도 모르고 우리 부부에게 고마워 할 듯하다.

삶에서 충돌이 없을 수 있을까? 그런 위기를 잘 넘기면 오히려 더 풍성한 삶이 될 수도 있을 게다. 세월이 흘러도 깨치지 못하는 내 우둔함이 문제다. 그래도 그런 틈으로 뜻밖에 도움을 받는 참새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이 작은 위로가 되기도 한다.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내 각박한 삶의 모습이 걱정이다. 이제 생각과 감정에 조금은 여유로울 나이에 이른 것도 같은데 그런 모습을 좀체 찾을 수 없다. 성숙해 가는 게 아니라 편협함이 굳어지고 고집스러워 가는 것 같다. 젊은이들이 소유하는 날카로움과 정확성, 효율성과 기술이 없다면 너그러움과 배려심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좋지 못한 습관들만 주렁주렁 달고 의무 아닌 권리만 내세우는 건 아닌가 싶다. 우리의 실수를 참새들이 유익으로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오묘한 섭리를 수시로 기대해도 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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