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윤희 수필가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산 녘 생강나무가 봄을 열고 있다. 노란 열꽃이 톡톡톡 말을 걸어온다. 어딘가에서 글감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대감에 기분이 알싸해진다. 좋은 글을 대할 때도 가슴이 뛴다. 환희산 자락에 둥지를 틀고 앉은 작가를 만나러 간다. 생거진천에 잠들어 있는 송강 정철이다. 한국 문학사에 최고봉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명작을 빚어내는 작가를 만난다는 건 봄을 맞듯 설레는 일이다. 대문호를 품고 있다는 건 행운이다.

영정을 모신 정송강사에 이르면 가장 눈길을 잡는 것이 시비(詩碑)이다.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 당시 지은 '훈민가' '관동별곡'을 비롯하여 '속미인곡' '장진주사'가 앞뒤로 새겨져 있다. 매화 향기로 시심을 부채질한다. 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물건과 작품을 본다. 진천과 연관된 것이 하나도 없다. 수많은 관직을 거치는 과정에서도 진천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생거진천의 역사적 인물이 되었을까.

그 중심에 우암 송시열이 있다. 우암은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은 조선시대 대 학자다. 우암은 늘 자신이 존경하는 송강의 묫자리를 마음에 걸려 했다. 어느 날 우암이 청주에서 진천으로 향하는 고갯마루에서 잠시 쉬던 중에 멀리 환희산 자락에 길한 묘터가 눈에 들어오더란다. 그렇게 하여 경기도에 있던 묘를 문중과 상의하여 옮기게 된 것이 인연이 되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송강의 삶은 롤러코스터였다.

조선 중기의 대문호이면서 정치가였던 그는 1536년 종로 청운동에서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다. 지금의 청운초등학교가 있는 자리다. 경복궁 서쪽에 있다하여 서촌이라 불리는 한옥마을이다. 첫째 누이는 인종의 후궁이요. 셋째 누이는 월산대군의 손자인 계림군 유의 부인이다. 송강은 열 살까지 궁궐에 드나들며 왕자들과 어울려 놀았다. 특히 친구처럼 지내던 경원대군이 명종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정치적 입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26세에 진사에, 이듬해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면서 한시, 시조는 물론 가사문학의 대가로 수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작가로서의 특징은 한시가 일반적인 당시 한글을 사용한 가사 문학을 꽃피웠다는 점이다.

한 인생이 대가를 이루기까지는 거저 되는 건 없다. 송강의 삶도 그렇다. 열 살까지 궁궐에서 살다시피 하던 삶에 가장이 정치적으로 연루되면서 추락한다. 이로 인해 청소년기를 전라도 담양에서 보내며 학문을 완성한다. 학자로서 문인으로서, 정치가로서 파란만장하면서도 대가를 이룬다. 잃은 것이 있으면 그만큼 얻음도 크다고 했다.

그에 대한 평가 또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58세 전 생애를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시대를 풍미한 걸출한 인물이다. 여러 지역에서 그를 기리는 이유다. 그를 학문적으로 성장시킨 담양에 가면 '가사문학관'이 있고, 경기도에선 '송강마을과 송강문학관'을 세우고 '송강 정철 문화축제'를 열며 기린다. 강원도에서는 '관동별곡 8백리'라 하여 그의 발자취를 걷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진천에서도 정송강사를 새롭게 정비한다. '송강 문화창조마을' 조성사업이다. 묘소를 비롯하여 정철 선생의 유적이 산재한 정송강사 주변을 문화창조마을로 만들어 대표적인 문화역사 관광지 인프라를 구축한다는 데 목적을 두고 연구용역을 마쳤다. 2025년 완공을 목표로 국・도비, 군비를 포함하여 15,390백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송강체험관' '송강문학공원' '작가집필실' '세미나실'을 마련한다는 야무진 계획이다.

 김윤희 수필가
 김윤희 수필가

한국 국문학사에 거목이 잠들어 있는 이곳, 환희산 자락이 새로운 문학의 산실로 재탄생될 날을 꿈꾼다. 소나무처럼, 때론 강물처럼 풀어낸 송강의 문학혼이 녹아 있는 잔디광장에 때맞춰 풀잎들이 움쭉움쭉 잎 주머니를 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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