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때 쌓은 가림성 올라기보니 눈앞에 펼쳐진 절경

편집자

산성(山城)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산의 정상부나 사면을 이용해 쌓은 성으로 적의 공격력을 약화시켜 항전함과 동시에 민간인의 피난처로 이용되어왔다.

우리나라 산성은 선사시대의 남부 시베리아나 만주 지방의 도피용(逃避用) 성책(城柵)과 아주 많이 닮았으며,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산성이 많이 축조되었던 기록이 있다.

고려 시대 몽골의 침략 때도 산성을 중심으로 항쟁하였고, 조선 시대에도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이 임난이어처(臨難移御處)로서 계속 중요시되어왔다.

현재 중부 이남의 지역에만 1200여 개 이상의 산성터가 남아 있어서, 우리나라가 산성의 나라라고 할 만큼 산성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규정짓고 보존하여 왔음을 실증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도시인 부여군이 차별화된 관광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펼치고 있는 다양한 테마관광 사업 중에 '백마강을 따라 여행'(2월 15일 자 보도)에 이어 부여군 산성 여행 코스를 살펴봤다.



▷부소산성

부소산성은 백제 사비기 왕궁의 배후산성이다. 평상시에는 왕궁의 후원 역할을 하다가 위급할 때는 왕궁의 방어시설로 이용되었다. 서쪽으로는 백마강을 끼고 부여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표고 106m의 부소산 정상에 축초 되었다.

부소산
부소산

1993~1994년에 걸쳐 실시된 고고학적 조사 결과, 계곡을 품으면서 외곽을 두르는 백제 시대의 성벽과 안쪽으로 통일신라 시대~조선 시대 성벽이 조성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백제 시대 산성의 전체 길이는 외곽선을 기준으로 2,495m이며, 바닥의 너비는 5~6m, 높이는 3m 내외이다.

부소산성의 문지는 현재까지 산성의 정문인 남문지와 동문지만 확인되었다. 또한 백제 시대의 병영으로 사용했던 수혈주거지 3기가 산성의 내부에서 발견되었다. 그 밖에 산성 내부에서는 백제에서 조선 시대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는 건물지, 석축, 저수조, 목책열 등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유구들은 부소산성이 백제 시대에 조성된 이후 오랫동안 중요한 군사적 거점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부소산성의 출토 유물로는 인장와·연화문수막새·금동광배·금동제 용두장식 등 백제 시대에서 조선 시대까지 다양하게 확인되었다. 특히 동문지에서 출토된 '大通'명 기와는 공주 대통사지의 유물과 같은 형태로 웅진 시기의 자재가 새로운 왕도 조영에 사용된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청마산성

부여 청마산성은 사비도성의 외곽산성으로 백제 산성중 가장 큰 규모이다. 이 산성은 백제왕도의 나성의 바깥을 지키는 산성으로써 서쪽의 가림성, 북쪽의 증산성, 남쪽의 석성산성과 함께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한 외곽 방어시설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청마산
청마산

산성이 축조 방법은 서쪽으로 깊은 골짜기를 성안에 두고 산 능선을 따라 석축 하였는데 성벽은 능선의 경사면을 통과하도록 축조하였다. 성벽은 바른층쌓기로 정연하게 쌓아 올렸는데, 확인된 높이는 최소 4~5m 이상이며 상부 폭은 3~4m 정도이다. 북쪽 성벽에서는 4~5단의 완전한 성축성벽이 남아 있다.

청마산성의 정문은 도성과 긴밀한 연락이 가능하도록 서쪽의 수구문 일원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성벽이 무너져서 확인할 수 없다.

성내에는 '각씨우물'이라 전해 내려오는 우물터가 있는데 수량이 풍부하며, 그 밖에 경룡사터와 의열사터 등이 확인된다.

▷부여나성

한반도 고대 삼국 중 최초로 축조된 나성은 백제의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중요한 외곽방어시설로 전체 길이가 6.3km에 이르는 외곽 성이다. 성곽은 부소산성에서 시작하여 북쪽과 동쪽을 감싸고 있는데, 부여의 서쪽과 남쪽은 금강이 자연적인 방어벽 기능을 하였고 강의 범람을 통하여 형성된 자연제방이 성벽의 역할을 대신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성 성곽 전경
나성 성곽 전경

나성은 방어 기능뿐만 아니라 수도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데, 사비기의 왕릉원인 능산리고분군과 왕실에서 세운 능산리사지가 나성의 바로 바깥에 위치하고 있는 점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나성은 산지와 평지를 연결하여 수도의 외곽을 둘러싸는 새로운 형태의 성곽으로 지형에 따라 특이한 축성 방식을 채용하고 있는 점에서 큰 특징이 있다. 구릉 구간은 흙을 다져 쌓아 올린 후, 성벽 외부를 돌로 쌓아 보강함으로써 성벽의 내구력을 강화하였으며, 저습한 평지를 통과하는 구간은 지엽부설 공법과 나무 말뚝을 박아 지반을 보강하는 등 독특한 축조 공법이 적용되었다.

동아시아 수도 대부분은 도시를 두르는 성곽을 구비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인데, 부여나성은 그 전모가 온전히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성곽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가림성

부여 가림성은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을 지키기 위하여 쌓은 석성으로, 사방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성왕 23년에 위사좌평 백가가 쌓았다고 전해진다. 백가는 가림성의 진수 명령을 받은 것을 원망하여 동성왕을 시해하고 가림성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당시 높은 관리인 위사좌평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가림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가림성
가림성

성안에는 남문·동문·서문의 문지와 우물지가 남아 있는데, 문지 안쪽으로 평탄지가 조성된 것으로 보아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물지는 3개소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남쪽과 북동쪽 우물지만 확인된다. 또한 백제 부흥 운동의 거점이기도 한 이곳에는 고려 초기의 명장 유금필이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다.

부여 가림성은 백제 때 쌓은 성곽 가운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이고,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부여군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야외박물관이라 불릴 만큼 다양한 문화유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역사문화 도시이다.

특히 백제 사비 시대에는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활발한 문화 교류를 통해 세련되고 격조 높은 문화 역량을 펼쳤다.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왕궁터인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고대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도성 체계를 보여주는 나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따스한 기운이 돋는 봄날, 부여에 있는 대표적인 산성을 돌아다니며 백제의 따뜻한 정취를 느껴보는 여행은 어떨까? /중부매일 윤영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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