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기 전 충북과학연구원장

하늘 물빛 정원이 펼쳐진 대청호 물길이 행복을 수 놓는다. 아침 물안개가 고요한 호숫가에 솜사탕으로 피어오르고, 잔잔한 바람에 수면 위로 비취색 치마가 사그락사그락 물결친다. 호수 속 어두운 산 그림자도 봄 옷으로 갈아입으려 준비한다. 부드러운 솜털 모자 쓴 벚나무 꽃봉오리는 미소를 짓고, 볼에 스치는 바람에도 흙냄새가 묻어온다. 내 마음도 호수만 한 마음이었으면 참 좋겠다.

대청호는 한국의 중심에 자리 잡은 명소이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대전과 청주지역을 걸치고 있는 인공 호수로, 오른쪽으로 청주 상당구 문의면 덕유리, 왼쪽으로는 대전 대덕구 미호동을 가르는 거대한 호수다. 식수와 농?공업용수로 쓰이는 금강의 젖줄이다.

대청호 오백 리 길은 스물한 개 구간마다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 개 구간이 약 10km 정도로 구성되어 있다. 연인끼리 낭만을 즐길 수 있는 데이트 코스, 농촌체험과 문화답사를 겸하여 걸을 수 있는 가족여행 코스, 등산이 가능한 산행 코스가 있는가 하면, 아이들과 함께하는 교육여행 코스, 푸른 호수를 감상하며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사색 코스가 있다. 그중 4구간은 대청호 길에서 보고 느끼며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인기 있는 올레길이다.

문의를 지나 대청호 입구 미천리(美川里)마을 표지석이 있다. 아름다운 내가 흐르는 동네라는 뜻인데 소리가 나는 대로 읽으니 왠지 부자연스럽다. 이름은 뜻도 좋지만 부르기 좋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선착장 나루터 전망대에 올랐다. 동산에 무리 지어 있는 적송이 은빛 여울지는 호수와 정겨운 밀회를 나누며 서 있다. 작은 쑥 잎이 손을 내밀고 애기똥풀도 기지개를 켠다. 자주색 봄까치꽃이 깜찍하게 피어 반갑게 맞이한다. 열매가 개불알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개불알꽃으로 불리기도 한다. 물의 정원과 함께 멀리 취수탑과 분수대가 보인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사공과 함께 굽이굽이 회룡포를 따라 산수를 즐기며 노래하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양성산이 있는 불당골 공원에는 산수유가 노오란 꽃잎으로 따스한 봄소식을 전한다. 옆에는 문화재단지와 객사로 쓰였던 자리에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인공 호수를 만드는 과정에서 보금자리를 잃고 떠나야 하는 실향민도 있었다. 불당골, 부수골, 터밭, 아래장터라는 네 개의 자연부락이 합쳐진 조동마을. 수몰되어 떠나는 아쉬움에 고향을 그린 유래비를 보니

"수백리길 물결만 출렁거려, 그냥 홀로 서성거리다, 마음은 대청댐에 남겨 두고 돌아간다"

라고 애절한 마음을 노래했다. 잃어버린 땅이야 다른 곳에 가서 또 다른 땅을 사면 되겠지만 보금자리를 틀고 오순도순 모여 살던 그 집 그 땅을 언제 다시 찾아볼 수 없으니 얼마나 슬픔이 크겠는가.

문화재단지 입구에서 솟대와 12간지 동물상과 눈을 마주했다.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는 고읍(古邑) 정자에 앉아 바라보는 대청호수는 수몰된 아픔의 여운이 남았는지 물안개로 덮여 있어 더욱 아련함이 들었다. 호수 속에 비친 나무 숲 그림자도 흐린 잿빛으로 보인다.

대청댐 전망대를 향하는 길가 마른나무 가지 끝에는 당장이라도 꽃피울 듯 꽃봉오리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옹기종기 줄지어 달려있다. 산모롱이를 지나는데 진달래가 수줍은 듯 방긋 웃는다. 그 너머로 목련꽃도 고개를 내밀고 있다. 나도 웃고 그들도 웃는다. 가을은 울긋불긋한 색깔이 마음에 스며들지만, 봄은 노랑, 분홍, 빨강색으로 생명력 있고 강렬한 눈빛으로 다가온다.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수면 위로 부서지는 햇빛이 눈부시다. 금강줄기 따라 능수버들이 봄맞이하러 줄을 지어 서 있고, 파랑이 넘실대는 거대한 호수에 물오리 한 마리가 떠다닌다. 그 움직임이 작은 파동으로 발끝에 전해진다. 바람과 물과 햇볕이 속삭이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눈을 감고, 가만히 귀 기울여 들었다. 혼자 걸었으나 결코 외롭지 않았던 대청호 오백 리 길은 많은 즐거움과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생명의 근원인 물이 희망찬 미래를 열듯이 우리의 삶도 가슴 시리도록 빛나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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