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영희 수필가

경칩이 지나니 산수유가 아이 속살 같은 꽃을 피워 올렸다. 절기로 자연의 이치를 생각하는 자신이 놀라웠다. "우수경칩에 대동강 물이 풀리고…"하던 옛 어른들 생각이 나서다.

산수유에 이어 생강나무, 개나리가 나의 노란색이 더 예쁘다는 듯 앞다투어 피기 시작했다.

남녘에서 매화꽃 향기가 꽃바람에 묻어 올라오는데 산책길의 매화나무는 늦잠을 자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매일 오르내리며 들여다보고 개화를 점친다. 한 열흘, 오일, 사흘… 바쁜 일이 있어 하루 산책을 걸렀는데 잠두봉이 은은한 향기에 싸여있다. 가히 암향부동이다. 늘 곁을 지키다가 임종 못한 자식처럼 오매불망 기다리고도 개화 순간을 놓쳐버린 허전함이라니. 하루 늦은 것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매혹적인 매향이 번지는 산책이 일 순위가 되었다.

'아무리 추워도 매화는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梅寒不賣香(매한불매향)을 신조로 살았다는 퇴계 이황이 떠올랐다. 그와 두향의 러브스토리도 뒤따라 나온다. 시절이 하 수상할 때 퇴계 이황이 48세의 나이로 단양군수로 부임한다. 아내와 자식을 한꺼번에 잃어 공허한 퇴계와 18세 관기 두향은 자연스레 연모하게 되었다. 9개월 후 퇴계가 풍기 군수로 떠나면서 남긴 한 시가 전해온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네."하고 퇴계가 먼저 운을 띠었다.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우는데/ 어느덧 술도 비워 없어지고 님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두향이 먹을 갈아 화답했다. 애절한 마음을 누르며 필설로 풀어내는 연인의 마음이 풍류적이고 비장미마저 느껴진다. 헤어질 때 두향은 매화 화분 하나와 수석 두 점을 선물했다는데 그 이후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퇴계가 유언으로 매화에 물을 주라고 한 것을 보면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순정이었으리라. 문학적 용어로 매화 화분은 두향의 알레고리이고 퇴계가 남긴 매화에 관한 한시 107편은 두향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라는 추측이 간다.

어떤 향수보다 좋다고 감탄을 자아내던 매향도 화무십일홍을 증명하듯 슬며시 사라졌다. 오며 가며 눈도장을 찍었던 우아한 백목련도 어느새 흙빛으로 변해 밟힌다. 젊어서는 순결하고 고고하던 하얀 꽃잎이 추하게 변하는 것 같아 싫었는데, 이제 생각하니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꽃이 피기를 기다리던 마음만큼이나 허전함이 컸다. 정인이나 아름다운 꽃일수록 떠난 자리는 더 허망하고 쓸쓸하다. 꽃 진자리는 꽃으로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벚꽃을 그려보며 무심천으로 갔다. 기후 온난화로 예년보다 열흘 정도 빨리 만개했다고 한다.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에 사람이 없겠느냐는 속담처럼 무심천 주변은 온통 인산인해를 이룬다. 향기는 없지만 꽃놀이도 한때이니 산책로를 임시로 옮기기로 했다. 6.5 킬로미터에 2천300여 그루를 심었다는 꽃 터널을 누빈다. 발을 밟혀도 눈을 두는 사방이 벚꽃, 개나리, 튤립이니 행복 충만이다.

그래서 본다는 동사를 '봄'이라는 명사로 써서 계절 이름을 지었구나 하고 다시 깨닫는다. 마스크를 벗고 푸드트럭 앞에 줄을 서 아이처럼 사 먹기도 하고 청주예술제 관람도 하면서 일주일이 지나갔다. 꽃잎이 나비인 양 눈송이인 양 꽃비로 내리던 날 밭은기침이 났다.

아직은 체력이 좋고 암기력이 있다고 자만했는데 너무 과신했나 보다.

"사는 일이 너무 바빠 봄이 간 후에야 봄이 온 줄 알았네/청춘도 이와 같아/ 꽃만 꽃이 아니고/ 나 또한 꽃이었음을/ 젊음이 간 후에야 젊음인 줄 알았네/ 인생이 길다 한들/ 천년만년 살 것이며/ 인생이 짧다 한들/ 가는 세월 어찌 막으리/ 봄은 늦고 여름은 이른/ 유월 같은 사람들아/ 피고 지는 이치가/ 어찌 꽃뿐이라 할까."

이영희 수필가
이영희 수필가

이채 시인의 '6월에 꿈꾸는 사랑'이 불현듯 떠 올랐다. 일찍 핀 꽃잔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며 피고 지는 이치가 인생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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