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은희 ㈜대원 경영지원본부장·수필가

산山이 나를 부른다. 시선이 자꾸만 희끗거리는 산 허리춤에 가 있다. 머리로는 산길로 내려가라고 하는데, 몸은 산으로 바다게 마냥 옆걸음질 친다. 산색이 고운 봄에는 오름이 힘겨운 나 같은 사람도 물리적 거리를 극복할 수 있는 계절이다. 하루가 다르게 연두에서 초록으로 산빛의 농도를 달리하는 이 시기, 산바람에 마음이 강하게 요동친다. 산빛은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멀면 먼 대로 다른 풍경으로 나를 유혹한다. 바로 이즈음 산도 바람난다고 하면 산신이 무어라고 하실까.

산山이 바람난 듯 날개옷을 갈아입는 요즘, 정녕 오월과 유월의 산색 농도는 확연히 다르다. 모든 삶은 흐른다. 하지만, 생애 한 장면을 정지시키고 싶은 순간이 있다. 바로 나뭇가지에 연두 새싹이 돋는 시기이다. 초록이 짙어지면, 이상의 '권태'가 떠오르는 지루한 여름이 이어진다. 그래선가. 산山은 어깨에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고 산빛을 즐기라고 귀엣말로 속닥거린다. 숲의 정령도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연두 옷을 차려입어 절로 춤이 춰지리라. 산바람에 윤슬처럼 반짝이는 새순과 산빛에 어찌 매혹되지 않으랴. 엉덩이를 무시로 들썩거리다 산사를 찾는다.

당신은 지금 몇 번째 봄을 맞고 계시나요? 산사 기행에서 문우와 나눈 첫 인사말이다. 눈치를 챘는지 모르겠지만, 봄을 '몇 번째' 맞는지 숫자를 헤아리는 질문이 아니다. 당신에게 감성으로 다가온 봄을 묻는 비유법이다. 올해도 이병률 시인이 읊은 '몇 번째 봄'이 흐르고 있다. 그의 언어를 좇아 햇수를 헤아리니 수십 년, 그러나 기억에 오롯이 남는 봄은 별로 없다. 시어를 깊이 음미할수록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든다. 현실의 나이와 감성의 나이가 달라서다. 현 나이는 쉰 살이 훌쩍 넘어 있고, 감성의 나이는 서글프게 미운 일곱 살 언저리다. 삶이 짧으니 겨우내 눈을 삼키는 고통을 어찌 알 수 있으랴. 말을 배우느라 입말만 구구절절 늘어놓아 꽃봉오리가 여물 리가 없다. 시인처럼 바람결에 흩날리는 꽃비, '종이눈'을 구경할 수도 없다. 어디 그뿐이랴. 아직 심상이 어리고 어둑하여 지독한 상처(칼)를 품고 이겨낼 용기도 부족하다. 그러니 동백나무에 맺을 붉은 꽃도, 동강동강 쳐낼 불꽃도 없다.

시인은 덧붙인다. '봄에는 전기가 흘러서' '고개만 들어도 화들화들 정신'이 없단다. 과연 나에게 자연이 화들화들 온몸이 감전된 듯 다가온 적이 있던가. 돌아보니 불과 몇 년 전부터인가. 직장의 정원에 고흐의 그림 속 아몬드꽃처럼 아름드리 핀 목련꽃이 보이고, 동백나무처럼 새빨간 명자나무 불꽃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로랑스 드빌레르는 《모든 삶은 흐른다》에서 삶의 예술은 '오티움otium', '유유자적'이라고 말하며, '비생산적인에 몰두하며 영혼과 정신을 높이 갈고 닦는 시간'이라고 적는다. '독서와 철학, 명상, 친구들과 대화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란다. 현대인은 자신이 세운 계획에 발을 묶어 로마의 유산 '오티움otium'을 잃어버렸단다.

십 대 후반부터 산악회에 가입하여 수십 년간 산을 매주 오르내렸다. 일행과 경쟁하듯 산정에 먼저 다다르는 것에 목표를 둔 산행이었다. 한라산, 월악산, 치악산, 설악산 대청봉까지 악산을 산악인처럼 두루 올랐지만, 그날을 사유하지 않았으니 어떤 심경이었는지 기억도 흐릿하다. 목표를 향하여 돌진하는 무소처럼 살아온 젊은 시절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은희 수필가·㈜대원 전무이사
이은희 수필가·㈜대원 전무이사

산山도 한철 바람난다. 산이 바람날 때는 산신도 그 품성을 알고 몸짓을 허락하지 않았으랴. 정녕 한 시절은 산山처럼 산바람, 들바람, 꽃바람이 나고 싶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목에 툭툭 새움이 터 품을 늘리는 신록의 계절. 산색이 연두인 시기에는 무작정 산에 들고 싶다. 산에 머물며 장자의 절대 자유의 단계인 '소요유逍遙遊' 경지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비행하다가 보름마다 불어오는 바람을 기다리는 열자列子의 삶도 좋으리라. 바람난 산에 머물며 산 식구들과 소통하고 돌아오면 남은 나날을 거뜬히 살아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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