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나는 누구인가. 인생의 강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필리핀 선교지를 방문하고 봉사활동을 가는 여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부부 동반으로 떠난 비행기는 필리핀 공항에 도착하였고, 입국 심사대에 줄을 지어 있었다. 사람들은 여권에 도장을 받고 들어갔고, 아내도 걸어 나간 후 내 차례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됐다.

심사대 위에 여권을 올려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심사원이 "NO!" 하는 것이다.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내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있기 때문에 입국을 허락할 수 없다는 거다. 내 이름과 동명인 자가 필리핀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떠난 사람이라며 컴퓨터 화면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영명英明과 생년월일까지 똑같은 것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을까?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필리핀 방문이 처음인데 어떻게 된 것이냐 반문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다. 한국에는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으니 사진을 보자고 했다. 아쉽게도 명단위에는 사진이 없었다. 한국에는 주민등록번호가 있으니 확인해볼 것을 요청하였으나 기록이 되어있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만 사용되는 것일 뿐이다. 결국 나는 날아갔던 그 비행기를 타고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선량한 국민이 동명이인(同名異人)이라는 이유만으로 오해를 사서 피해를 보는 억울함을 겪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이 억울한 사실을 기록하여 외교부와 통일부에 보냈다. 필리핀 외교부에 사진과 주민등록번호를 기록하게 하여 구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일주일 후 연락이 왔다. 그것은 그 나라 주권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간섭할 수 없다고 한다. 블랙리스트의 그 사람은 캐나다와 동남아시아 몇 개 나라에서도 비슷한 잘못을 하여 추방당했다고 한다. 이름은 같으나 사람이 다름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니 너무나도 답답한 일이다.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고 확인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했다.

서울 전화번호 책을 들춰 보았더니 나와 같은 이름이 3페이지가 넘는다. 아주 흔한 이름이다. 주소와 나이, 성별과 얼굴 특징으로 구별이 가능하지만 이름만 가지고는 분간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더구나 생일까지 같게 기록 되었으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여권의 이름을 바꾸어 보려고 발급 신청을 해보았다. 그러나 한번 발급된 영명 이름은 글자를 변경할 수가 없다고 한다. 필리핀에서는 동명이인일 경우 여권으로 범죄자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블랙리스트로 등재된 사람은 입국이 거부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이제 그가 다녀간 나라를 다시 입국할 수 없다는 슬픔에 넋을 놓고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반평생 걸어온 교육여정의 정년퇴임을 앞둔 겨울이었다. 과학 리멤버팀이 오로라를 보기 위해 캐나다 옐로우나이프를 가자고 한다. 흔쾌히 승낙하고 비자를 신청했다. 동행자들은 비자를 발급받았는데 주인공인 나의 비자가 나오질 않는 것이다. 함께 못 가면 이번 여행이 김빠진 맥주처럼 얼마나 허망할 것인가 잠이 오지를 않았다. 그동안 북미 유럽과 호주 등 외국에 다녀온 증빙자료를 다시 보내며 심사를 요청했다. 하루 전날 비자가 발급되어 함께 여행을 갔고, 천상의 아름다운 쇼를 보면서 감사의 노래를 불렀다.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귀국한 후 내가 범죄자가 아님을 증명하고 싶었다. 하여 한국주재 필리핀대사관에서 '비동일인증명서'를 발급받고 필리핀에 입국했다. 그리고 필리핀대사관에서 열 손가락 지문을 찍고, 부모 이름까지 기록한 신원조회를 받은 후 무범죄임을 증명하는 필리핀 NBI 증명서를 발급받았다. 20년 만에 동명이인을 떨쳐버리는 기쁨은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았다. 어떻게 살아야 나의 존재와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가. 같음과 다름에 대한 다림줄을 깊이 사색하며 내 안의 속사람을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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