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은희 ㈜대원 경영지원본부장·수필가

사람들은 청보리를 보러 섬으로 간다. 일상의 틈을 낼 수 없는 나는, 우중에 미술관으로 찾아든다. 관람객이 없어 전시 공간은 광활하다. 회벽에는 초록 바다를 연상하는 듯 푸른 파도가 너울거린다. 내 가슴도 덩달아 잉큼잉큼 뛰고 있다. 청보리는 바람과 일체가 되어 흔들리고 있다. 보리 줄기는 날이 선 수염의 존재감도 잊은 채 유연하게 바닥으로 드러눕는다. 바람이 잦아드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 청보리는 꼿꼿이 제자리에 서 있다.

그림 속 청보리의 표현이 세밀하다. 혈맥이 흐르는 듯 잎맥도 세세하다. 바람결에 청보리의 맥박이 느껴지는 듯하다. 여물지 않은 푸른 이삭이 줄기 끝에 알알이 맺혀 나그네의 가슴을 흔들고 있다. 그림 속 청보리는 바람결을 따라 군무 중이다. 누군가의 말대로 바람이 청보리를 키운 것일까. 그런데 서로의 몸이 부딪혀도 생채기가 보이지 않으니 이 모습을 어찌 설명하랴. 아마도 바람과 보리, 보리와 보리에 간극의 거리를 잘 조율하고 있는가 보다.

온몸에 맥이 풀리면 모든 것이 귀찮아진다. 일이 싫증이 난 것이 아니라 몸이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침대에 시체처럼 드러눕고 싶은 심정이다. 몸이 사정없이 쓰러지는 순간에 무엇이 눈에 들어오랴. 이 순간만은 그 어떤 것도 나를 흔들 수가 없다. 하지만,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위대한 인물이 있다. 바로, 자식이다. 자녀를 키우던 시절에는 자식의 일이라면, 누웠다가도 다시 꼿꼿이 일어서지 않았던가. 육신의 맥이 풀려도 정신력으로 버티고 서 있던 푸른 나날들. 보리도 마찬가지일 듯싶다. 이방인은 들녘에 출렁이는 청보리밭에서 환호성을 지르지만, 바람결에 흔들리는 보리는 긴장을 늦추지 않으리라. 상대를 보호하고 배려하느라 여념이 없다.

나이를 먹을수록 숙맥으로 사는 것도 좋을 듯싶다. 하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일이 많은 사람은 본업 외에도 일이 보태지고, 일을 잘 처리하여 일이 줄어들지를 않는다. 오죽하면, 자신을 우스갯소리로 '무수리도 상 무수리'라고 말하랴. 남의 부탁을 냉정히 거절하지 못하는 성향도 있고, 스스로 일을 만들고 업어 오는 격이니 누구를 탓하랴. 돌아보면, 그래서 서로에게 도드라지지 않고 인맥을 유지하는지도 모른다.

다시 황금 보리밭 그림 앞이다. 시선을 사로잡은 박영대 화백의 「황맥黃麥(1988년)」은 한지에 먹으로 그린 대작이다. 늦가을 추수를 앞둔 들녘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참으로 넉넉하고 풍요롭다. 화가는 한 작품에 몰두한 시간이 자그마치 2년이 넘는단다. 그의 삶은 보리를 출산하기 위한 일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리를 향한 열정은 그 누구도 뛰어넘지 못하리라. 그는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농부의 삶을 잘 알고 있다. 생의 체험으로 눅잦힌 그림이라 보리의 결을 생생히 표현하였으리라. 한 시기는 보리를 떠나 나무를 그려보지만, 보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후반기로 갈수록 푸른 보리보다는 누런 보리가 좋단다. 그림도 보리의 실제 묘사에서 반추상적 기법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는 맥의 줄기를 잡고 일생을 불태우고 있다.

 이은희 ㈜대원 경영지원본부장·수필가
 이은희 ㈜대원 경영지원본부장·수필가

맥脈은 생명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소중한 기운이자 줄기이다. 맥이 끊기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이자, 좋아하는 일도 손을 놓아야만 한다. 자연의 순리를 아는 화백도 생의 맥락을 짚고 은근과 끈기로 보리를 그렸기에 뭇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명작을 낳을 수 있었으리라. 그가 일군 '보리미학'에서 글감을 얻고자 발서슴하는,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언어의 '연금술사'인 파울로 코엘료 작가도 매일 악전고투를 벌인다고 적는다. 글쓰기를 미루고 자성하는 작가의 죄의식처럼 나도 '아침에는 괴로워하다가 저녁에는 글을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뇌리에 스치는 '글맥'을 부여잡고 성큼성큼 미술관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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