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진순 수필가

부부가 교육을 갔다. 아니 황혼 여행을 즐기러 갔다는 표현이 적합 할듯하다. 마치 신혼 여행가는 신부처럼 마음이 들떠 여행가방을 챙겼다.

1975년 4월 20일 날 결혼을 했으니까 꼭 48년을 살았다. 부부가 함께 여행을 간 것은 다섯 손가락을 꼽을 정도이다.

남편은 건강을 잃은 지 꼭 15년이 되었다. 뇌경색으로 언어장애와 반편이 자유롭지 못하다. 식도암에 갑상선까지 지병으로 휘둘림을 당하다 보니 우울하다.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얗고 병색이 깊어가는 남편을 바라보는 마음은 마치 창 없는 방에 갇힌 기분이라고 할까, 그래도 화장실 출입과 아침 뒷동산 산책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남편이 웃을 수 있는 농담꺼리를 준비해서 즐겁게 해주려고 노력은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다 나 까지 디스크와 협착, 무뤂이 부실해져 움직이기가 불편하다. 이것은 아주 정상적인 황혼에 걸어야 할 인생길이다.

하나하나 주변을 정리한다. 호스피스 교육을 10년 전 받았지만 잊은 것 같아서 다시 또 받으며 마음에 준비도 했다. 요셉 공원에 우리부부가 누울 자리도 마련해 두었다. 일요일이면 난 외짝 교우라 혼자 성당을 간다. 그 자리에 비록 불편한 남편과 함께 손잡고 가고 싶은 소망이 있다. 고집이 황소인 남편은 아무리 권해도 함께 갈 뜻이 없어 보였다.

그러던 차에 종교의 구분 없이 부부가 함께 받는 ME 교육이 있다기에 신청서를 냈다. 점점 건강이 부실해져 가는 남편이 언제 요양원을 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니 마지막 황혼 여행을 즐기러 가자고 남편에게 말했다. 방안에만 있는 것이 답답했던지 아주 흔쾌히 승낙을 했다.

우리는 주말에 2박 3일 ME 교육을 갔다. 교육 선배라며 젊은 부부가 우리 집까지 태우러 왔다. 성당에 들려 신부님께 강복을 받고 우리 부부는 현도에 있는 산속 작은 교육장으로 안내 되었다.

우리는 쉴방을 배정 받고 교육에 임했다. 집에서 시도 때도 없이 시한폭탄처럼 벌컥 거리며 화를 잘 내던 남편이라 눈치를 살폈다.

호화롭지도 않고 평범하지도 않은 환경을 잘 적응 할지 걱정이 앞섰다. 근데 의외로 남편은 불평 없이 잘 따라주었다. 1970년대 근무 했던 학교처럼 딸랑 거리며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단체 생활을 시작 했다.

여행 준비로 피곤했던지 부부는 잠을 설치지 않고 잘 잤다. 수녀님들이 준비한 뷔폐로 아침을 먹고 시간표대로 움직였다.

일상생활에서 부부가 살아가는 이야기가 주가 되다보니 모두 공감 가는 이야기요. 자식 농사를 지으며 빚어지는 갈등들이니 무뤂을 치며 듣게 되었다. 더욱 감동으로 다가 오는 것은 발표 부부들의 경험담을 오픈하는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남편의 눈은 초롱초롱 빛나며 어쩌면 집에서처럼 화도 내지 않고 즐거워하던지 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사랑스러운 아기를 보는 듯 했다.

그리곤 지난날들을 돌아보았던지 처음으로 미안한 마음으로 솔직해 지는 태도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쌓이고 쌓인 섭섭했던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며 하나하나 무너져 내려 우리 부부는 눈시울을 적셨다.

우리는 그렇게 이틀 동안 어린애처럼 울고 웃었다. 마지막 날 그곳에 온 부부 13쌍들의 환해진 얼굴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천진난만하게 노래를 부르고 손뼉을 치면서 나이와 환경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사는 것이 모두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공감대를 느낄 수 있는 강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부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이진순 수필가
이진순 수필가

정말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의 생활도 엿볼 수 있었고 서로 공동체 생활을 잘 하려면 어떤 덕목을 어떻게 이해 애야 하는지 참으로 배울 것이 많은 교육이었다.

우리 부부는 황혼 여행을 즐기는 동안 정말 많이 미안 했다는 말과 앞으로 멋지게 살자며 두 손을 꼭 잡고 시간 시간을 알차게 보냈다.

이번 황혼 여행이 마지막일지도 모르지만 난 또 다른 여행을 주선하고 싶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