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타박타박 꼬부랑 할머니가 걸어간다. 얼굴은 땅을 향하고 등은 하늘을 치켜본다. 누님이다. 지팡이에 온 힘을 쏟고 한 발자국씩 내딛는 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애처롭다. 육거리시장에 가시는 모양이다. 천천히 뒤를 따라 이것저것 손에 든 보따리를 받아들고 인사를 했다. 힐끔 뒤돌아보는 안면에는 반가움이 가득하다. 언제나 나의 든든한 후견자였다.

누님은 비바람을 이겨낸 강둑의 억새처럼 어린 시절은 보냈다. 부모님이 논과 밭으로 나가면 막내둥이 나는 누님의 등에 업혀 자랐다. 어린누이는 등에 업은 아이를 내려놓을 수 없어 울면서 어머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렸다. 젖배를 곯은 아기는 칭얼대다 지쳤고, 하루종일 막내를 업고 있던 누님은 허리가 아파서 울었다. 여자는 시집가서 못하는 것 없이 일을 잘해야 한다고 어머니는 온갖 집안일을 시켰다. 밤이면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을 했고, 샛바람에 마른 빨래를 다듬이질 하느라 밤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많았다.

살림밑천 맏딸이 시집 갈 나이가 되었다. 가난에 한이 맺힌 어머니는 재산이 많은 부잣집에 시집보내기를 원했다. 논과 밭 수천 평 가진 땅 부잣집 남자와 선을 봤다. 매형은 전형적인 충청도 사람으로 과묵한 분이다. 다정한 말을 잘 하지 않는 툭툭한 말투지만 매사 신중하게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촌부자는 일 부자다. 농사일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씨앗을 뿌리고 김매는 밭농사 일이 시작되면 하루해가 모자란다. 밭일은 풀과의 전쟁이다. 하룻밤만 자고나면 밭이랑에 수북하게 돋아나는 풀들로 가득 찬다. 곡식이 풀에게 지면 농사를 망치게 되고, 결실이 없으면 시골 한겨울 저녁은 죽으로 끼니를 때워야 한다. 농기계로 갈아도 수천 평을 관리하기가 쉽지 않은데, 호미와 괭이로 자라나는 풀과 싸워야만 하는 것은 아낙네의 힘으로 역부족일 뿐이다. 손목과 무릎이 시큰하여 밭둑에 앉아 한참동안 머무르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흙먼지가 범벅이 된 땀방울은 베적삼을 흠씬 적셨다.

그렇게 힘들게 농사지은 참깨와 들깨로 기름을 짜면 '챙기름''들기음'이라 이름을 삐뚤빼뚤 쓴 병에 담아 준다. 누이의 따뜻한 사랑이 진하게 전해오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리고 아렸다. 가을이면 김장김치를 담아 형제들에게 주고 논과 밭에서 나온 곡식들을 나누는 정은 마음 자락을 짠하게 울렸다. 세월에 시달린 동생들의 야윈 얼굴이 보이면 걱정이 태산이다. 시골 살림살이에 써야 할 돈이 부족할 텐데, 남몰래 호주머니에 꾹 넣어주는 굳은살 배긴 손끝의 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돈으로 살 수는 없는 마음이다.

부모님이 농사일하느라 바쁘기 때문에 누이가 막내인 나를 업고 학교에 가면 그때마다 소꿉친구들이 놀렸다. 수업 시간 배가 고파 우는 아이의 소리가 들리면 급우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오줌이나 똥을 싸서 냄새가 날 때는 선생님마저 얼굴을 찡그리며 못마땅해 했다. 어린학생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벅찬 일이다. 끝내 국민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집안일을 해야만 했다. 문해할머니가 된 그 짠한 모습을 보는 내 가슴은 깊이 멍들었다.

삶의 울타리가 되어주던 두 형님들은 세상을 떠났고, 이 땅엔 누이와 나만 남았다. 누이는 산수를 훌쩍 넘겼다. 기억력은 점점 쇠퇴하여 방금 들은 것도 잊어버린다. 손과 팔뚝을 만져 보면 근육은 없어지고 뼈와 살가죽만 잡힌다. 두 볼은 웅덩이처럼 움푹 패고 주름만 얼굴에 잔잔하게 펼쳐졌다. 치아는 대부분 빠져 웃으면 합죽이가 된다. 이제는 기저귀를 차야 할 정도로 신체 조절 능력이 떨어졌다. 출산 후 집에서 삼일도 몸조리를 하지 못하고, 들로 나가 콩밭을 매던 누이는 건강을 잃어버린 것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의 허전함이 무상연가를 부르게 한다.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감나무에 올라가 누이를 '존조배'라 부르면 누이는 '준땜아'하고 놀리던 동화나라 같은 추억의 고향 집이 떠오른다. 지금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왜 그렇게 불렀는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서로 사랑한다는 애칭이었으리라. 고희를 바라보는 이 나이에도 땅거미가 내려오는 저녁이면, 가슴을 토닥이며 잠을 재우던 누님의 자장가 소리가 마음속에 들린다. 긴긴 겨울밤 콩설기를 만들어 베개 머리맡에 놓아주고는 별나라 꿈나라 이야기를 꽃피우던 그 밤이 여전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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