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경영 수필가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엄마를 도와 일하는 언니들이 있었다. 한 언니가 왔다 가고나면, 또 다른 언니가 왔다. 밥만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던 어려운 시절이었던 것 같다. 살림 밑천을 만들어 시집간 언니들도 있고, 서울살이 고되다며 다시 고향으로 내려 간 언니도 있다. 쌈지돈을 모아 고향 부모남께 보내고 동생들 학비를 보태는 언니도 있었다. 서울에서 일찍 터를 잡은 부모님 탓에 일가친척들의 정거장 같은 곳이 우리 집 이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엄마는 하룻밤 또는 며칠씩 묶으며 신세지는 그들에게 주는 것이 복된 삶을 사셨다. 어린 눈에 비친 우리 집은 서울 인심을 나누는 종갓집 엄마 손이 있어 늘 사람들이 북적였다.

외사촌오빠는 엄마랑 동갑내기다. 외할머니와 큰 외숙모가 같은 해 아이를 가졌다. 시어머니는 막내딸을, 며느리는 아들을 낳았다. 외할아버지는 딸보다 손주가 우선이다. 고모랑 조카랑 동기동창으로 학교를 같이 다녔다. 딸은 시집을 보냈고, 손주는 전답을 팔아 대학을 보내 교사가 되었다. 오빠는 방학이면 대학원 공부를 하러 서울로 왔다. 외할아버지는 손주 밥값으로 딸에게 쌀 한 짝 씩 보냈다. 남녀차별의 벽이 평생 한으로 남는다고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엄마의 밥상은 언제나 풍성했다. 박사학위를 받고 국립대 교수가 될 때까지 우리 집은 오빠의 베이스캠프였다. 교수님 조카 뒤에는 동갑내기 친구이자 고모의 배려가 있어 가능 했을 것이다.

아버지 쪽 상황도 마찬가지다. 우리 집에 꿀을 발라놨는지 엄마 아빠 신세를 지지 않은 친척들이 거의 없을 정도다. 서울에 오면 으레 한 끼 식사와 잠자리가 해결되는 참새 방앗간이 따로 없다. 가끔씩 엄마에게 귀동냥으로 언니들의 소식을 듣는다." 다복이는 어디로 시집을 갔고, 은자는 어떻게 살고 있으며, 금자는 지금도 일하고 있다더라."구순을 바라보는 엄마의 안부를 물으며 살뜰히 챙기는 은자언니가 보고 싶다고 엉덩이를 들썩거리신다. 만석꾼이 되어 잘 살고 있다는 언니를 만나러 엄마를 모시고 짧은 여행길에 나선다. 그 옛날 한솥밥을 먹으며 같이 살다, 세월의 강을 건너 50여 년 만에 얼굴과 얼굴을 마주했다. 마당 있는 예쁜 집 안주인은, 집보다 몇 배나 더 큰 창고를 가지고 있었다. 창고 안에는 온갖 농기계와 농산물이 가득 쌓여있고, 농사지은 양파와 과일즙을 내는 기계까지 있다. 이 끝에서 저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땅을 바라보면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가슴 벅차다는 언니를 보니 나도 좋았다.

형부는 처제가 생겼다며 연신 벙실벙실, 언니와의 만남부터 살아온 세월을 풀어냈다. 넘실대는 새만금 물결 방조제를 지나 변산반도를 한 바퀴 돌았다. 바지락 죽을 먹고 초록물결이 넘실대는 만경평야를 보고 풀코스로 장어구이까지 대접받고 언니와 함께 긴 밤을 밝혔다. 언니가 말했다" 니가 교복입고 학교 가는 게 부러웠어. 너 없을 때, 니 교복입고 가방 들고 학교 가는 연습을 혼자 해 본 적도 있다. "학교 가고 싶었던 언니의 마음을 그땐 왜 몰랐을까? 철없던 소녀가 인생 가을 길에 다시 만난 언니와 그땐 그랬노라 말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했다. 트렁크가 가득 차고 넘칠 정도로 바리바리 싸주는 큰 손언니를 말리지 못했다. 그 후로도 지금까지 철철이 택배를 보내주는 언니의 시골 인심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경영 수필가
이경영 수필가

어우렁 더우렁 서로에게 그늘이 되고, 바람막이가 되는 그런 후덕하고 너그러운 마음이 인심이다, 그래서 인심을 천심이라 임금의 덕목 중 하나로 치기도 했다. 부모님의 나눔과 베품 그 넉넉한 인심 덕분(德分)에 누군가는 은혜를 입었다. 그 인심이 흘러흘러 언니와 또 다른 이를 통해 내게로 전해온다. 엄마는 그냥 베풀었지만 그것이 자녀들에게 복이 되어 나는 늘 인덕(人德)을 누리며 감사로 살고 있다. 곳간 인심은 결코 공짜가 아닌 것 이었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