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진순 수필가

소나기가 줄기차게 쏟아진다. 지붕위로 물방울을 튕기며 발장구 치는 소리가 난타소리처럼 요란하다. 풀 향기와 흙냄새가 대지의 온기와 함께 테크위를 적시고 있다.

분꽃과 봉숭아 사루비아와 레몬밤 버가못 애풀민트 향기가 너울거리며 춤을 추고 있다.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팔뚝으로 쓱쓱 문지르다 어머니 생각에 목울대가 뻐근해 왔다.

어머니는 오늘처럼 천둥번개가 치며 비가 오는 날도 논밭두렁에서 사셨다. 논둑이 터질세라 물꼬 보러 삽 들고 들판을 겅중거리시던 우리 어머니.

시대를 잘못 타고나신 어머니는 마대자루 접어서 머리에 쓰고 몸 빼 바지 중중 걷어 올리시고 비 오는 날도 바쁘기만 하셨다. 지금처럼 비닐로 만든 우비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긴 다리 휘청거리며 삽짝을 들어서던 우리 어머니.

비 맞으며 캐온 감자와 옥수수, 고구마를 쪄서 배불리 먹여 주시던 어머니는 시계추처럼 집과 논밭을 밤낮으로 왕래하며 세월을 엮었다.

청 보리 싹 뾰족이 나올 때는 우리들과 부리 밭을 밟았고 마늘잎이 병아리 주둥이처럼 내밀면 갈퀴 들고 아가 머리 빗기듯 마늘밭을 다듬었다. 거름과 비료가 흔치 않아서 인분장군을 메고 나가시던 날은 온종일 퀴퀴한 인분향이 엄마를 따라 다녔다. 어머니께서 걸머지고 다니시던 종다리엔 씨앗과 비료 호미가 담겨 있었지, 거름내고 흙을 부숴 푸성귀 부치던 어머니 직장은 휴일이 없었다.

우리들 아침 먹여 학교 보내고 거름통 어깨 메고 밭에서 온종일 끝도 나지 않는 풀과의 전쟁을 해야만 했다. 해거름이면 오이,고추 토마토 푸성귀를 솎아 대바구니 가득 가져오셔서 반찬을 장만 하시던 어머니의 모시적삼에선 쉰 땀내가 났었다.

학교 갔다 돌아와 말끔히 정돈된 방에 배 깔고 엎드려 숙제를 하다 대문 앞에 어머니 기침소리 들리면 우리 삼남매 쪼르르 달려 나가 어머니를 반겼다. 무섭기가 호랑이 같았던 우리 어머니는 눈이 크고 키가 커서 전봇대란 별명을 가졌다. 말씀이 별로 없으셨던 어머니 얼굴 살피며 맏이인 날 늘 겁먹게 하셨던 우리 어머니.

해질 때면 난 부엌에서 보리쌀 닦아 밥을 짓고, 둘째는 방과 마루를 먼지하나 없도록 청소를 해야 했다. 막내는 마당비 들고 마당을 분이 나게 쓸어야 했는데 우리는 매일같이 어머니께 칭찬을 들으려고 맡은바 임무에 충실하게 했었다.

닷세에 한번서는 장날 어쩌다 어머니께서 장에 가실 땐 선반위에 흰 고무신 내려 신고 가셨다. 두고 가신 헌 고무신을 지푸라기 수세미에 비누칠해서 문질러 하얗게 닦았다. 댓돌위에 헌신을 얌전하게 올려놓으면 흐믓한 미소가 칭찬이었다. 살면서 때때로 어머니가 새록새록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다.

궂은일 험한 일 가리지 않으시고 소갈데 말갈데 다 다니시며 돈 벌어다 아비 없는 삼남매 가르치고 배불리 먹여 주시던 우리 어머니는 남자처럼 성격이 대쪽 같았다.

생계 잇기 어려워 진학을 포기하고 친구들 학교 가는 모습 부러워 뒷간에서 속울음 삼키다 들켰을 때 우리엄마 가슴 얼마나 메어 지셨을까.

돈이 생기면 밀가루를 사서 다락에 차곡차곡 쟁여 놓으시며 쌀과 땔감만 있으면 나머지는 해결된다하셨던 어머니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재산을 불리려면 땅을 사야 아무도 가져가질 못한다던 어머니 말씀 어째서 귀 밖으로 들었던지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 뒤돌아보니 물거품처럼 사라져간 돈들이 나를 비아냥거린다.

운동을 잘해서 다람쥐란 별명을 가진 남동생을 등대로 삼으셨다. 당신 인생을 우리들 위해 희생으로 살으셨다. 아버지께서 물려준 재산 그대로아들에게 넘겨주면 할 노릇 다한 것이라하셨다. 부지런함을 바탕에 깔고 근면 성실 인내를 몸으로 실천하며 동동걸음치며 살다 가신 어머니생각이 오늘 따라 왜 이리 간절한 걸까.

이진순 수필가
이진순 수필가

한바탕 소나기 퍼 붇더니 앞산위에 무지개 날보고 어서 오라 손짓을 한다. 곱고 고운 무지개 사이로 어머니 얼굴 보일 것 같아 고개를 길게 빼고 산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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