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전원 전 청주교육장

얼마 전 모 언론사에서 시청자를 대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외래어'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1위가 '스트레스(stress)'라고 보도한 적이 있었다. 스트레스는 이제 현대인들의 필수 생활용어가 되고 있으며, 그 해소방안의 탐구도 왕성하지만, 스트레스의 주체가 주종과 상하와 노사 내지는 바늘과 실의 고정된 종속관계로 이변이 없는 한 그 해결책은 요원할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의 스트레스는 자기가 하고 싶거나 좋아서, 아니면 삶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일(業)에 대한 복종역할이 원만하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로 정의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런 스트레스는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거라서 자신이 싫으면 수용하지 않으면 될 것이나, 세상살이에 여러 가지로 불편한 스트레스를 내가 싫다고 거부하면 자기 삶은 어떻게 이끌 것이며, 더불어 사는 세상을 독불장군 할 수 있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평균수명도 많이 늘어날 것이고, 150세 꿈도 아름답게 피어날 텐데.

생명이 있는 모든 동식물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의지 포함 여부와는 상관없이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이나 조건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해로운 정신적·육체적 자극으로 다양한 반응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반응 상태가 바로 스트레스다.

갓난아기의 칭얼거림이나 새싹의 시듦은 새로운 환경이나 여건 변화에 따른 두려움과 공포 탈출의 무기력에서 비롯된 생리적 스트레스의 시작이니 평생을 그 스트레스와 동행해야 함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고속으로 승진하여 절정에 오른 이는 도전자들과의 무한경쟁과 추락 대비에 중단없이 스트레스를 달고 살아야 하고, 자연재해로부터 안전을 지키고 싶은 동식물의 종족 보존과 환경에의 적응력 등도 다름 아니리라. 누구를 위해 만든 삶의 원리일까? 그것도 하늘의 섭리인가?

스트레스 발생의 주(主體)와 종(客體)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상황과 조건의 변화·개선 방안을 부정하고 자기중심적으로 불리한 상황극복에만 집중하여 심신의 긴장 상태 연속으로 자제력까지 소진되면 가장 소중한 생명도 잃게 된다. 도대체 목숨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게 뭣이기에?

스트레스의 주(要因)와 종(反應)도 가변적이어서 종의 조건반응이 상황변화를 이끌어 스트레스 상태를 완화하거나 소멸시킬 수도 있겠지만, 주(雇用人)와 종(雇傭人)의 결단으로 상호 만족하는 경영 방안을 찾아 운용한다면 어쩌면 더 효율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스트레스 없는 생활을 원한다면 자신의 판단으로 자신이 부담 없이 감당할 수 있는 상황까지의 일만 수용하면 될 것이며, 어떤 스트레스도 용납할 수 없다면 그 일을 접으면 될 것이다. 다만 그 일을 포기함으로써 부수적으로 찾아오는 개인적인 어려움은 자신이 책임 감내해야 할 막중한 과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스트레스는 내가 요청하여 받는 것이므로 내 일의 종노릇이 싫으면 그 일을 그만두면 될 것이며, 삶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누군가의 피동인(被動人)이 되는 것도 피하면 될 것이다. 어쩌면 그 이후의 삶까지도.

결국 사람은 누구나, 심지어 대통령까지도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으므로 자신의 능력껏 지고 살아야 한다. 스트레스는 완치가 없으므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적정한 양만큼의 하중을 조절하는 게 현명한 치료 방법일 수도 있다.

적절한 스트레스는 동·식물에게 활력을 주고 생산성과 창의력을 높일 수 있으며, 적당히 긴장시켜 집중력을 높여 줌으로써 일의 진행을 지지부진하지 않게 하는 긍정적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김전원 전 청주교육장
김전원 전 청주교육장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는 과도한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 되지만, 일의 목적과 행위가 일치하여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면 스트레스는 저절로 물러나므로, 동행하는 일에 대한 긍정의 마음가짐에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고, 칭찬과 격려에 사랑 더해 정성 들인 기반으로 자신 있게 박차고 출발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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