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바다가 그리워, 갈대숲이 그리워 열차 속에서 내가 달린다. 을숙도는 낙동강 하구에 모래와 진흙의 퇴적지로 만들어진 섬이다. 동양 최대의 갈대숲은 철새 도래지다. 겨우내 눈이 내리지 않는 따뜻한 남쪽 지역이다. 모래톱 위에는 철 따라 날아오는 새들의 보금자리가 숨어 있다. 수만 평 우거진 갈대숲은 하늘과 맞닿은 듯 지평선을 이룬다. 황금빛 낙조가 드리울 때 황홀한 광경은 입을 다물 수 없다. 연인들이 사랑을 싹틔우는 밤에는 유난히 갈대숲도 흔들린다. 을숙도는 3년간 고달프고 외로웠던 군 생활을 묻어둔 곳이다.

한 청년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빨간 승용차가 추월을 했다. 살짝 창문을 열어 놓은 채 선글라스를 쓴 아가씨가 운전을 하고 있었다. 시속 110Km로 달린다. 서로 눈길이 마주쳐 손짓을 했다. 살짝 크락숀을 울리며 내달을 때 문득 따라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 줄 곳 달려 간 곳이 에덴공원이다. 그곳은 을숙도 전경이 잘 보이는 곳이다. 차 한 잔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이 흘러 어둠이 깊어졌다.

"우리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어데예."

"에덴공원요."

"언제예."

" 내일 저녁 이 시간에요."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시간을 맞춰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렸다. 밤 열시가 넘도록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경상도 말은 억양의 높낮이에 따라 긍정과 부정으로 표현 되는 경우가 있다. 그녀의 대답은 모두가 부정을 표현한 것이었다. 을숙도 아가씨한테 멋지게 바람맞은 친구의 이야기다. 순진한 총각이"어데예. 언제예."글자의 의미만 믿었던 탓이다.

낙동강나루터 횟집을 찾아 들어갔다. 회 한 접시와 세발낙지를 주문했다. 바다냄새가 물씬 스미어 있다. 낙지 몸통에 다리를 감아 초고추장을 푹 찍었다. 다리를 씹으니 꿈틀꿈틀 바다 향기가 입안에 녹아든다. 빨판이 혀끝에 살며시 달라붙는다. 주인장이 힐끗 쳐다보더니 우리를 알아본다.

"야이 보리 문딩아! 반갑데이."

"그동안 별고 없으셨지요?"

"하모, 아주 잘 있었데이…."

만나면 반갑고 서로 웃어 줄 수 있는 추억이 남아있어 정다웠다. 낙동강 사하구의 사람 사는 맛이다. 욕하는 것 같이 들리지만, 뚝배기의 된장국처럼 구수하다.

백사장 모래알들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잠시 드러누워 소라껍질을 귀에 대고 바다 이야기를 듣는다. 스쳐가는 갯바람도 엿듣는다. 일몰을 바라보는 황홀경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동양의 나폴리다. 남해 다대포 바다의 푸른 물은 하늘을 닮았다. 바다가 하늘같고 하늘이 바다 같다. 바닷물을 한 움큼 잡으면 파란 하늘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바다는 천의 얼굴을 갖고 있다. 비바람이 불고 소나기가 쏟아지면 태고시절 천지를 창조하는 듯 검은 물결이 무섭게 넘실댄다. 태풍이 오는 날은 갯바위들을 삼킬 듯 성난 밀물이 다가와 부서진다. 물보라가 수십 미터 솟구치는 풍경은 장관이다. 멀리 지평선 너머로 낙조가 드리우면 영혼을 잃어버린 것처럼 무아지경에 빠진다. 감미로운 노을에 잠시 눈을 감을 수밖에 없다. 몸이 사르륵 사르륵 녹는 것 같다. 벚꽃 길에는 연인들의 숨결이 가득하다. 도심의 휴식공간이요 데이트하는 장소다. 속삭이는 밀어들이 갈대 바람을 타고 언뜻언뜻 귓가를 스쳐 간다.

낙동강 하구의 물길에는 다양한 삶의 역사가 도도하게 흐른다. 을숙도와 함께 열어가는 공존과 상생의 길이 우리의 삶을 더욱 건강하고 풍요롭게 한다. 황금빛 노을이 서녘 하늘을 물들인다. 눈이 부시다. 강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숲은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을숙도 갈대밭에는 연인들이 걷는 비밀 숲길이 여러 개 있다. 고즈넉한 숲길에는 철새들도 조심하여 노닌다. 질척질척한 갯벌에는 게들이 바스락 거리며 달려 나온다. 손잡고 가볍게 걷는 발걸음은 젊음의 향연이리라.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머플러가 나폴거리는 뒷모습에는 알 수 없는 기쁨이 보인다.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두 손 높이 들고 석양의 노을 앞에 서면 너무도 멋진 그림이 사진 속에 박힌다. 을숙도의 낭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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