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경영 수필가

프리지아 꽃향기가 아침을 깨운다. 살아있어 볼 수 있고 향기를 맡을 수 있음에 이 순간이 감사하다. 천천히 조심조심 손목을 움직여야하는 약간의 긴장감과 느슨함이 나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한다. 그 날의 사고는 내게 잠시 쉬었다 가라는 쉼표를 찍었다. 손목 골절 수술 후 일거수일투족 남편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어른 아이가 되었다. 의사선생님의 첫 번째 지시는 운전 금지령이다. 무리하게 손을 쓰는 일은 절대 안 되고 꾸준히 재활치료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운전기사에 밥 짓기와 청소 설거지 등 집안 살림 모두 남편 몫이 되었다. 사실 주부가 하는 일이란 별로 표가 나지 않는 어려운 일들이 많다. 남편은 아내가 해 왔던 일상을 체험하는 삶의 현장 속으로 훅 들어 왔다.

"밥 먹은 그릇을 개수대에 놓을 땐 물을 꼭 부어 불려놓아라. 기름기 묻은 그릇은 포개놓지 말아라. 그래야 설거지 하기가 쉽다. " 는 등 청소기를 돌리고 바닥을 닦으며 잔소리가 하나 둘씩 늘어난다. 주부습진이 생겼다고 핸드크림을 발라달라며 애교 섞인 투정도 부린다. 사십년 주부경력 고수 앞에서 어디 쨉도 안되는 소릴…. 가끔은 하얀 종이를 바닥에 깔고 돋보기를 쓰고 아기를 대하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성스러운 의식을 치른다. 그것은 손톱 발톱을 깍아 주는 일이다. 손톱이 자란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의 증거니 이 또한 내겐 감사의 조건이 아닌가. 확실히 그는 남의 편이 아닌 내편이 맞다. 아내를 위해 내어주는 그 손길이 진심으로 다가와 봄날 햇살처럼 따스하다

하늘이 뻥 뚫린 듯 비가 억수로 퍼붓는다. 곳곳에 물난리 소식이 다. 없어서는 안 되는 꼭 필요한 고마운 물이지만 가끔 화가 나 심술을 부리면 사람을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 쨍하고 햇살이 내리쬔다. 우리나라 여름도 점점 동남아 아열대 날씨를 닮아가나 보다. 그리 달갑지 않은 손님으로 소나기 스콜이 슬그머니 들어왔다. 모든 일이 생각한대로 이루어지기란 결코 쉽지 않다. 사람의 마음도 흐렸다가 맑았다하는 변덕스런 날씨같다. 비갠 뒤 맑은 하늘이 상큼한 것처럼 밝고 긍정적인 매일을 채우는 삶을 그린다.

퇴직 후 놀이터를 만들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고 천 여 평의 땅에 나무를 심었다. 햇빛, 바람, 물, 자연이 공짜로 주는 하늘의 선물 외에는 따로 한 것이 없다. 그런데도 나무는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잘도 자란다. 자기를 좀 더 사랑 해 달라고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양 손과 팔로 기지개를 켜며 손짓한다. 몇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내왔을까? 켜켜이 시간의 나이테를 쌓아간다. 생긴 그대로, 자연 그대로, 언제나 변함없는 온새미로다. 나무들과 좀 더 가까이 지내려면 물리적 거리를 좁혀야만 했다. 놀이터의 주인노릇을 할 때가 온 것 같아 고심 끝에 나무농원에 집짓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경영 수필가
이경영 수필가

명랑한 새소리, 바람이 지나가는 길, 피톤치드 향기와 그늘, 숲 속 벤치…. 말만하면 만들어주는 자상한 목수 할아버지 손길이 머무는 공간을 가지고 싶다. 뚝딱뚝딱 못질한 나무 의자에 기대어 쉴 수 있는 농장을 만들고 싶다. 오랜 시간을 견디어낸 소나무 옆에 숲 속 도서관도 짓고 싶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작은 카페도 있었음 좋겠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밤 새 창문을 두드리는 세 찬 비가 내리더니 아침 햇살이 방긋 얼굴을 내민다. 시간의 바퀴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우리네 시계도 그렇게 흘러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 시계가 멈출 때까지 꿈꾸는 어른 아이로 살고 싶다. 나는 두 번 쩨 그림을 그리며 다시 또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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