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모임득 수필가

꽃들이 환한 미소로 반기는 묘소는 처음이다. 자줏빛 물결이다. 오래된 소나무 아래 뽀리뱅이, 미나리아재비 노란색과 꿀풀 자주색이 지천이다. 꿀풀이 산기슭의 볕이 잘 드는 곳에서 자라서인지 봉분 위에도 꿀풀로 치장했다.

백곡 김득신(1604~1684)은 조선 중기의 대시인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자공, 호는 백곡이다. 진주목사 김시민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김치이다.

묘소는 충북 증평군 율리 좌구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양지바른 곳이다. 묘는 동자석童子石이 좌우에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봉분이 그리 높지 않은 소박한 외형을 하고 있다. 위에는 부친인 남봉 김치金緻 (1577~1625)의 묘와 아래로는 아들인 김천주金天柱의 묘가 함께 있다. 비문 표지석을 보니 오랜 세월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백곡은 어려서 천연두를 심하게 앓아 머리가 아둔해졌다고 한다. 자질도 그리 좋지 못하였다. 10살이 되어서야 글을 깨쳤다고 한다.

주변에서는 명문가에 바보가 나왔다고 수군덕거렸지만, 부친은 그런 선생의 노력을 장려하였고 성공할 수 있다는 무한한 신뢰를 주었다고 한다. 백곡의 아명兒名은 '몽담夢聃'이었는데, 이는 '노자의 꿈을 꾸고 태어난 아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선생은 부족한 자질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같은 내용의 글을 수만 번이나 읽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며,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사마천의 사기 백이전을 11만 3,천번이나 읽은 것으로 유명한 백곡이다.

수만 송이 바람에 물결치는 꽃들이 선생이 책을 읽은 횟수를 나타냄인가. 묘에 잠들었어도 책을 읽고 있는 것은 아닌지. 책 읽은 횟수를 만 번 이하는 적지 않고 만 번 넘게 읽은 책만 억만 번의 독서 '독수기讀數記'에 적어 놓았다는데, 잠들어 있으면서 책 한번 읽을 때마다 꽃 한 송이 피어냈음인가.

나는 글을 쓰면서도 편식하고 있다. 장르가 수필이다 보니 수필 관련 책만 눈에 들어온다. "무릇 이들 여러 편의 문체가 모두 다른데 어찌 읽기를 멈추겠는가?" 책을 편식하는 내게 이름인가.

백곡은 같은 고문古文을 수만 번 반복한 이유를 기록하였다. 단순히 둔함 때문인 줄로만 알았던 백곡의 책읽기가 독서 그 자체에 대한 즐거움과 문장의 완성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김득신은 동자석 옆 묘비명을 생전에 이렇게 써놓았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었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 데 달렸을 뿐이다.'無以才不猶 人自畵也 莫魯於我 終亦有成 在勉强而己―<김득신 묘비명>

노력하다 보면 이룸이 있다는 말이 와 닿는다. 모두가 포기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하여 끊임없이 과거에 도전하였고 마침내 1661년(59세)에 이르러 증광시에 합격하여 꿈에 그리던 성균관에 입관하게 된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다니. 대기만성형 인물이다. 그 열정과 끈기가 대단하다. 나는 48살에 병시중을 시작하고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나니 십여 년이 유수같이 지나갔다. 58살이란 나이에 인생 2막을 무엇을 시작할 수 있을까. 공부를 시작한다고 해도 환갑이 넘는 나이. 그렇게 현실에 주저앉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라도 시작했으면 지금 결실이 있지 않았을까.

햇볕을 등에 받으며 김득신 묘소를 찾아 오른 길, 흔치 않은 내 이름에 득자하고 김득신의 득자가 얻을 득得 같아서 더 친근했었다. 김득신처럼 계속 노력하다 보면 씨앗은 몰라도 꽃망울이라도 맺지 않을까.

바람에 일렁이는 보랏빛 물결을 바라보다가 묘지 양쪽에 있는 동자석에 시선이 머문다. 선인의 인상을 보는 듯 마음이 편안하다. 동자석은 무덤 앞에 세우는 모습의 돌 조각상이다. 무덤 주인의 영혼을 위로하고 무덤을 지키는 지신地神으로서 저승길의 동행자이자 안내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모임득 수필가
모임득 수필가

삼대가 모여 있는 곳에서 유독 백곡 묘 위에 더 많은 꿀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니 지금이라도 공부하는 게 늦지 않다고 일러주는 것 같다.

무덤가에서 피어 웃기 때문일까. 살랑대는 꿀풀에서 역사의 숨결과 바람의 감촉이 느껴진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