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난영 수필가

아파트 쓰레기 집하장을 지나다 보면, 새 주인을 기다리는 각종 서적, 서예 작품, 가재도구를 가끔 만나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올해는 나도 하나, 둘 정리하고 있다. '역사대사전', '한국가곡대전집', '의학대사전'을 눈 딱 감고 내다 놓았다. 미련이 남아 '동아세계대백과사전'은 아직 가지고 있다.

지구온난화와 엘니뇨현상으로 지구촌 곳곳이 이상기온에 시달리고 있다. 무덥고, 건조하여 세계 곳곳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하고,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다. 우리나라도 무더위와 장마가 갈마든다. 해님이 방긋 웃는 어느 날 눅눅해진 책을 거풍시키다가 '동아세계대백과사전' 책장을 넘겨보았다. 주인의 무관심이 야속했으련만 다소곳하다. 첫 장을 보다가 적잖이 놀랐다. 인터넷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ㄱ만 하더라도 한글 자모음의 하나라는 것부터 ㄱ당사건, ㄱ자예배당, ㄱ자집 등 구체적인 해설에 그림과 사진까지 있어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다. 보물 상자나 다름없는 백과사전을 짐이라 생각한 것이 미안했다.

그동안 왜 백과사전의 진가를 몰랐을까. 반성하며, 책장을 넘겼다. 걸교전乞巧奠이란 단어가 눈에 훅 들어왔다. 혹시 걸프전이 잘못 표기된 것은 아닌가 하고,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걸교전乞巧奠이 맞다. 걸교전은 중국에서 칠석날에 하는 행사로 음력 7월 7일 밤에 부녀자들이 오색실을 견우와 직녀 두 별에게 바쳐 바느질과 길쌈을 잘하게 해달라고 비는 풍속으로, 걸乞은 빈다는 뜻이요, 교巧는 길쌈과 바느질 잘하는 솜씨이며, 전奠은 물건을 바쳐 제사 지낸다는 의미란다. 한국에서는 이를 걸교乞巧라고 한단다.

칠석하면, 견우와 직녀의 사랑 이야기가 회자된다. 동화책으로도 출간되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옥황상제, 은하수, 까치와 까마귀, 오작교는 귀에 익숙한데 걸교라는 단어는 처음이라 생소했다. 백과사전에는 걸교 뿐만 아니라 듣도 보도 못한 단어가 수두룩했다. 갑자기 아둔패기 된듯하나 호기심을 자극했다.

걸교乞巧가 칠석날 하는 행사였다니. '칠석'이란 단어만 보아도 눈가가 촉촉해진다. 칠석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내가 네 살 때 하늘의 별이 되신 아버지 기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막내 올케 생일이고, 제일 가까운 친구의 생일날이기도 하다. 해마다 생일 축하 문자를 보내는 나에게 친구는 세월이 가도 녹슬지 않는 머리라고 칭찬하지만, 아버지를 잊지 못해서다.

칠석은 지역에 따라 칠성날, 꼼비기날, 농현, 풋구, 호미씻이, 호미걸이라고도 한다. 우리 마을에서는 백중날 일꾼에게 일을 시키지 않고, 온종일 쉬게 하거나 장터에 나가 여가를 즐기도록 했다. 하여 호미를 손에서 놓는다는 뜻으로 호미씻이나 호미걸이라고 했다.

칠석 절식으로는 밀국수, 밀전병, 규아상, 깻국탕, 증편, 오이김치, 시루떡, 복숭아화채 등이 있다. 풍습은 지역마다 집집마다 다르겠지만, 우리 집은 아버지 기일이니 각종 전과 제사음식을 장만하느라 하루 종일 기름 냄새를 풍겼다. 큰오빠가 시골에 살 때만 해도 제사 음식을 넉넉하게 하여 이웃들과 나눠 먹었다.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이니, 기일이 아니라 잔칫집 분위기였다. 지금도 칠석날이면 형제들이 오매불망 아버지를 기리며, 우애를 다진다.

이난영 수필가
이난영 수필가

우리는 지금 손가락만 터치하면 화엄의 세계가 손바닥 안에 다 펼쳐지는 인터넷 시대에 살고 있다. 미국에서 생산된 물건도 스마트폰으로 결제하면 며칠 지나지 않아 집에 도착한다. 세계시장을 핸드폰으로 볼 수 있으니, 온 세상이 다 내 시장이 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어도 핸드폰이나 컴퓨터 기기에는 한계가 있다. 사용법을 모르고, 단어를 모르면 찾을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백과사전은 모든 분야의 지식을 알기 쉽게 풀어서 집대성해 놓은 지식의 보고다. 읽는 재미까지 쏠쏠하다. 하루에 백과사전 한두 페이지만 읽어도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될 듯하다. 감탄하며, 아버지를 보듯 걸교乞巧와 눈맞춤 한다. 견우와 직녀, 아버지의 실루엣이 미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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