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한식 수필가

날카로운 새 울음소리가 언제부턴가 내 귀에 꽂히고 있다. 바늘 끝인 양 아픔을 느꼈던지 감성적인 막내가 조금 전 일어난 끔찍한 일을 들려준다. 새소리가 하도 다급하고 강렬해 창밖을 보았더니 고양이가 새 한 마리를 물고 가더란다. 그걸 현장에서 본 새의 울음소리가 저렇게 지속되고 있다고 했다. 그렇구나, 그런 애달픈 사연이 있었구나.

내가 주먹만 한 돌멩이를 가지고 그 장면을 보았다면 고양이를 향해 던지지 않았을까? 강자가 약자의 생명을 빼앗는 불의를 그냥 넘길 수 없었을 테니까. 가만, 그게 불의인가? 치열하게 생존을 이어가는 자연계에서 약육강식이 잘못인가? 그 고양이가 굶주렸을 수 있고 혹은 새끼들을 먹이려 했는지 모르지 않는가. 고양이에게 옳고 그름을 들이댈 수 있을까?

서럽게 우는 새의 처지가 되어보자. 눈앞에서 죽음의 공포와 함께 물려가는 새는 어떤 관계였을까? 서로 사랑하는 짝이었을까. 그때도 물려간 새의 성에 따라 감정이 다를 것이다. 눈앞에서 수컷이 물려가는 것을 본 암컷이라면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으로 남은 날을 살아가리라. 자식들에게 경계대상 첫째가 고양이임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전해줄 게다. 그토록 처절한 슬픔을 토해 내다니 열녀조(烈女鳥)일 게다.

서럽게 우는 새가 수컷이라면 어떨까? 사랑하는 짝이 죽음으로 몰리는 걸 보면서 지켜주지 못한 무력감에 가슴이 허물어졌으리라. 그 슬픔에 힘이 진할 때까지 하늘을 날다 어느 건물 유리벽에 부딪쳐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서러움과 한이 지나쳐 고양이를 좇아가 밤낮 짝의 한풀이를 궁리한 끝에 고양이가 방심하고 무력한 순간에 한방을 날리지 않을까? 고양이와 새 한 마리가 목숨 걸고 싸우는 장면을 보면 그 고양이와 새라고 생각하시라.

애타하던 새가 부모의 불행을 목도한 자녀라면 어떨까? 새끼 새라면 먼저 주체할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 같다. 날개를 펼 수 없고 발이 떨어지지 않는 공포에 찌익, 찌익 비명만 질러댈 수밖에 없을 게다. 그 장면을 잊지 못하고 기쁘고 슬픈 순간마다 그 모습이 운명처럼 살아나리라. 도시화되고 많은 사람들이 홀로 살아가는 현대, 고양이는 오히려 사람들의 반려동물이 되고, 천적이 없는 고양이에게 어떻게 일격을 가해 부모의 한을 풀어줄까 하는 고민을 할 것 같기도 하다. 체념이 빠른 새라면 고양이와 새의 관계는 애초에 그런 것이니 고양이를 조심하라고 이르는 선에서 그치고 제 삶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 광경을 본 것이 부모 새라면 어떠했을까? 애끓는 심정으로 그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한동안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슬픔과 한이 깊어 왜 대신 죽지 못 했나 한스러워 하리라. 그 고양이를 기억해 보복을 하거나 고양이라면 가리지 않고 목숨을 건 일전을 벌일지 모른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슬픔과 한을 안고 기회를 노릴 부모 새에게 맡겨두자.

가만, 이 모든 사념들이 인간중심은 아닐까? 온 생명들이 치열하고 찬란하게 살아가는 생태계를 인간의 잣대로만 재단하려는 아집과 편견일 수 있다. 어쩌면 새들은 그렇게 복잡하고 깊은 생각을 하지 않도록 만들어졌을 게다. 본능에 충실하여 자연의 순리를 따라 살아가며 그들의 방식대로 종족을 이어가고 자연 속에 나고 죽으며 이 초록별의 역사를 이어가리라.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새나 고양이뿐 아니라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은 과도하게 땅을 차지하고 재산을 증식하지 않는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비축하고 들짐승들이 제 영역을 표시하지만 천문학적 과욕은 부리지 않는다. 사자와 호랑이라고 거주지를 옮길 때, 세간을 챙겨 바리바리 싣고 가는 걸 보았는가? 욕심과 집착을 떠난 삶이 어떠하다는 것을 그들이 인간들에게 보여주는 건 아닐까?

내 귀에 파고들던 강렬한 새 울음이 다시 이어진다. 그 설움과 아픔이 주변에 울려 퍼지는 것 같다. 한스런 가슴을 지닌 가련한 새여, 그 감정을 서서히 비우라. 머지않은 날, 다시 빈 마음으로 푸른 하늘을 훨훨 날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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