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윤희 수필가

처서가 지났지만 따가운 햇살은 여전히 정수리를 내리꽂는다. 마지막 알곡을 익히느라 햇살도 저리 혼신을 다해 제 몸을 사르는 것이리라. 8월 15일 그를 찾아가는 날도 뜨거웠다. 한 시인이 살아온 삶의 향기를 느끼고자 나선 문학기행이다. 그가 견뎌온 세월에 비하면 이깟 땡볕쯤 아무렇지 않다는 건 머리만이 알뿐, 몸은 나도 모르게 그늘만 골라 디디며 문학관 앞에 이르렀다.

청포 입은 포도 몇 그루가 먼저 나그네를 맞는다. 강직하고 기개 넘치는 쥔의 성품에 비해 야윈 모습으로 겨우 흉내만 내고 서있는 청포도가 애잖다. 일제 강점기 목숨을 내놓고 치열하게 살다 간 그의 삶이 등한시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민족시인 육사 이원록 선생 상 民族時人 陸史 李源祿 先生象' 이라 쓴 흉상 뒤로 숫자 17, 30, 27, 44가 선명하게 하게 각인되어 있다. 17은 17번의 감옥생활을, 30은 첫 시 '말'이 발표된 해를 의미한다. 27은 첫 옥살이가 시작된 해이고, 44는 베이징 감옥에서 나이 마흔 살로 순국한 연도를 나타낸 것이다.

이육사 선생은 1904년 안동에서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손으로 태어나 1944년에 순국한 독립운동가이며 시인이다. 이원록이란 이름이 어엿하지만, 육사란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수감번호 264번에서 비롯된 필명이다. 1930년 처음 '대구사회단체개관'이라는 글에서 한번 사용했는데 선생이 장진홍의거에 엮어 1년 7개월 동안 감옥생활 할 때 받은 번호였다고 한다.

1932년 조선일보 기자 시절 고기 육肉, 설사 사瀉를 써서 '육사생肉瀉生'이란 필명으로 세상을 풍자했다는 이야기와 항일 혁명을 꿈꾸며 264에서 죽일 육戮에 역사 사史를 쓰려했다는 기록을 보며 얼마나 비장하게 독립운동을 해 왔는가 감히 짐작해 본다.

청포도알 형태로 형상화 된 선생의 안경 낀 얼굴이 인상 깊다. 그 옆으로 '계절의 오행' 수필 일부를 소개 놓았다. '내가 들개에게 길을 비켜줄 수 있는 겸양을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을 겁내서는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내 길을 사랑할 뿐이다.' 짤막하게 써 놓은 수필에서도 그의 비장함이 강하게 느껴진다. 문학관에 준비되어 있는 초록색 포도알 모양의 종이에 응원의 메시지를 몇 자 적어 그의 얼굴에 거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발길을 돌렸다.

예나 지금이나 작가는 글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많은 작가들이 글을 통해 강하게 항일 민족의식을 일깨우며 독립운동에 앞장서 왔다. 육사 선생 역시 그랬다. '청포도' '광야' '절정' 등 10여 년 작품 활동에 녹아 있는 정신은 온통 항일의 의지였다. 그러나 그는 펜을 통해서만 행동해 온 게 아니다. 실제 총을 들고 싸웠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나와 의혈단에 가입하여 온몸으로 직접 투쟁했다.

그렇게 목숨으로 지켜온 대한민국이 지금은 어떠한가. 역사의식은 사라지고 말만 무성해지고 있지 않은가. 그동안 참으로 안온하게 살아왔음을 새삼 느낀다. 그저 막연히 독립운동에 참여한 저항 시인으로만 알았던 이육사가 새롭게 다가온다. 섬세한 감성과 과감한 투쟁 의식의 어찌 이리 같은 크기로 공존할 수 있는지.

김윤희 수필가
김윤희 수필가

이번 문학기행을 통해 신선하게 만난 그의 시 '꽃'을 보면 정신은 물론, 형상화된 시어 자체에서도 감동이 밀려온다.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 눈 속 깊이 꽃맹아리가 옴작거려 /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

역시 육사는 시인이었다. 조국 광복에 대해 한시도 꺾이지 않은 희망과 열정을 품은 독립투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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