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시선 수필가·옥산중 교장

나는 올해로 서른네 해째 교직을 수행 중이다.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수행이라고 표현했다. 예전에는 봉직이라는 말도 썼는데, 좀 이게 껄끄럽다. 교직이 과연 무언가. 교직을 수행한다는 것이 뭔가. 요즘처럼 이런 질문을 많이 한 적이 없다.

최근 서이초 교사의 극단적 선택은 충격이었다. 대통령을 지낸 분이 바위에서 몸을 날린 사건보다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니, 왜 선생님이 그런 선택을 해! 아, 이럴 수가. 그 정도로 어렵고 힘들었다는 말인가. 나는 중등에 있지만 초등학교가 이럴 정도였는지 몰랐다. 이어서 도미노처럼 일어난 극단적 선택도 대부분 초등교사였다. 나는 고등학교에서 6년이나 있다가 중학교에 왔는데, 말을 들어보니 고교와는 달랐다. 소위 민원이라는 것이 꽤 있었다.

나의 교직을 돌아본다. 대략 세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1기는 체벌이 허용되던 시기, 2기는 그래도 지도가 통하던 시기, 3기는 가능하면 지도를 하지 않으려는 시기다. 이는 어디까지나 학생 지도와 관련해서다. 요즘은 한마디로 3기에 해당한다. 되도록 그냥 넘어가라고 한다. 왜냐하면, 지도하다가 봉변을 당할 수 있고 아동학대로 신고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랬다. 체벌이 허용되던 시기, 참 못된 선생도 있었다. 본때를 보여준다고 별것도 아닌데 애들을 쥐어팬다거나 분풀이하는 분도 있었다. 이를 부인할 수가 없다. 나는 실제로 고교 때 담임교사한테 본때로 한번 되게 맞은 적이 있는데, 지금도 그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하여, 나는 교사 때 체벌은 거의 행사하지 않았다. 꼭 매를 대야 할 때는 모종의 의식을 치르고 감행했다.

교직이란 무엇인가. 성직이니 전문직이니 노동직이니 하는 담론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다만 본질을 파고들고 싶다. 교육은 말 그대로 가르쳐서 기르는 일이다. 따라서 교권이란 가르칠 권리다. 교사에게 가르칠 권리가 없다면, 교사를 하지 말라는 얘기와 똑같다. 교사의 사는 스승 사(師)이다. 판검사의 사는 일 사(事)이고, 변호사의 사는 선비 사(士)이다. 왜, 교사에게는 스승 사를 붙였을까. 자명하다. 교사란 가르치는 스승이란 뜻이다. 여기서 스승이란 존경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먼저 모범을 보이라는 뜻이 더 강하다.

2010년대 초반으로 기억한다. 어느 순간'교육 서비스'란 말이 등장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말을 정말 싫어했다. 근데 여기저기서 쓰니 나도 동화되어갔다. 그래, 교육도 서비스라니 서비스 열심히 해야지. 그럼 학생은 고객? 학부모는 손님? 와,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은행이 떠올랐다. 은행에 가면 얼마나 친절한가. 고객이 왕이다. 학교에서도 학생이 왕이다! 이러면 지나친 표현일까. 자라나는 학생은 정말 고귀하다. 정말 왕 대접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옛날 왕자도 수업받을 때는 스승에게 예를 다하였다.

사람들은 한국식 교육이 실종됐다고 한다. 예를 들어 밥상머리 교육, 효, 웃어른 공경 등 말이다. 이런 것이 사라져서 묻지 마 폭력, 흉기 난동 사건이 일어난다고 진단한다. 한국은 이제 완전 서구화를 넘어 불량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고 질타한다. 나도 여기에 일정 부분 동의한다. 교육 서비스를 기대하는 일부 학부모는 내 아이 지상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내 아이에게 불이익이 가거나 서비스 질이 불량하면 바로 민원을 넣는다. 서비스를 잘해야 하는 교사는 어떠한가. 요즘 이른바 MZ 세대라고 하는데 학교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가끔 교사의 사도 이제는 일 사(事) 자를 써야 하지 않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다.

최시선 수필가·옥산중 교장
최시선 수필가·옥산중 교장

교육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 교육입국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교육이 나라를 세운다는 뜻이다. 근본이 바로 서야 길이 생긴다. 그 근본은 교사는 교사답고 학생은 학생답고 부모는 부모다운 것이다. 이제 나도 교직 내리막길이다. 내려갈 때가 더 힘들다고 한다. 그저 조심하며 수행해야겠다. 그래도 희망을 품으면서. 교육은 미래의 희망이니까.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