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영희 수필가

그는 화가로 자리매김하여 공예전이 낯설게 다가온다. 입체주의 선구자이며 현대미술의 천재 작가로 불리는 피카소 공예전이 열리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전시실 앞이다. 회화뿐만 아니라 도예, 판화, 조각 무대 미술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든 예술가라고 고정관념을 수정한다. 명절 연휴라 그런지 계단의 긴 줄은 꼬리를 보이지 않는다. 2021년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 중 피카소 도예 107점을 작고 50주년에 의미 있게 기획 전시하고 있다.

기다림으로 일탈을 꿈꾸던 며칠간의 행복이 소환되었다. 모처럼 일주일 가까운 연휴를 핑계 삼아 아이들이 해외여행을 권했다. 살아온 세월을 아는지라 꼭 부모가 가야 하는 티켓이라며 하얀 거짓말로 유혹했다. 웬일로 남편도 쾌히 동조하는 듯해서 못 이기는 척 넘어가고 싶었다. 모처럼 과감하게 훌훌 떠나자. 조상을 기리고 혈연의 뿌리를 돈독히 하는 명절에 어찌 갈 수 있겠느냐로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도리질을 쳤다. 떠날 준비를 대충 했는데 아버님이 나타나셨다.

"우리 세대는 해외여행을 별로 하지 않아서 살던 집 외에는 못 찾아간다." 너무나 생생한데 꿈이었다. 이제껏 명절 차례와 성묘를 해 왔으니, 생시에 하시던 말씀 그대로를 명징하게 꿈으로 떠올린 게다. 추석이 가까울수록 갈 수 없다는 데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아쉬운지 그만큼 했으면 되었다고 부추겼으나 맛있는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 없어지는 것을 아쉽게 바라보아야 했다. 남편은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스스로 결정했으니 자기 탓은 아니란다. 역시 고수다. 버릇이나 습관이 결국 팔자라고 하던 친구 말이 떠올랐다.

학창 시절은 잘한다는 말에 동기유발이 되어 하지 말라는 짓은 하지 않았다. 공직을 직업으로 선택했으니 제도권 안에서 준법정신은 필수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 언감생심 일탈을 꿈꾸다니.

다행히 우리까지 1차 관람단에 들어갔다.

부러울 것 없이 화가로서 절정을 이룬 말년에 피카소가 지중해 연안 도시 발로리스에서 휴가를 보내며 새롭게 도전한 장르가 공예이다. 발로리스는 로마 시대부터 분홍색 황토로 만든 질그릇을 대량 생산해 온 피카소 박물관이 있는 프랑스의 남부 도시이다. 피카소는 6·25가 일어나자 옛 수도원이 있던 반원형 터널에 '전쟁과 평화'란 제목으로 벽화를 그려 실상을 알리기도 했다. 발로리스의 마두라 공방에서운명같이 자클린 로크를 만났다. 피카소가 공방에서 그녀를 만나고 도예를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것은 화풍을 변화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피카소의 작품에서 빠질 수 없는 삶과 예술의 원동력인 소재가 여인이듯 그녀를 모델로 한 '이젤 앞의 자클린' 등 4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노장의 피카소가 더욱 왕성하게 작업을 하도록 도운 조력자이기도 하다. 마두라 공방을 처음 방문했을 때 제작한 '목신의 머리'는 신화를 주제로 했다. 반인반마 켄타우로스나 반인반우 미노타우로스와 같은 신화 속 인물에서 자신과 유사함을 발견했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 냈다. 여인과 동물, 신화와 투우, 사람들과 얼굴 등을 반복적으로 표현하거나 주제의 상충적 결합으로 새로운 창작을 했다. 그는 스페인에서 출생한 만큼 투우장을 즐겨 다녔다. 투우를 언어 없는 대화라고 일컬으며 삶과 죽음에 대한 관념을 예리하게 표현했다. 점점 흙과 불의 특성에 매료되어 해방감을 만끽하며 엄청난 도예 제작을 해냈다. 도예에서 회화와 조각· 판화의 요소를 두루 발견할 수 있는 점은 피카소 도예의 묘미이며, 그만의 재기발랄함과 천진함이 동시에 드러나는 유희적 도예의 특징이라고 한다.

이영희 수필가
이영희 수필가

대미를 장식하는 영화 '피카소를 만나다'를 뒤로 하고 나오는 길, 끊임없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영원한 청춘 피카소는 일탈의 미련을 말끔히 지워 버렸다. "유능한 작가는 베끼지만, 천재적인 작가는 훔친다"라고 한 그의 말을 음미해 본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