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병부㈔한국문인협회 서산지부장

한여름 무더위와 장마가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그야말로 좋은 계절이 돌아왔다.

올여름은 유난히도 무덥고 비 피해가 심해서 새로운 계절이 주는 변화는 더욱 소중하고 고맙게 느껴졌다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던 지난주에 알찬 가을 여행을 다녀왔다.아침 7시에 서산을 출발, 대전역 동광장에서 어렵게 승차한 관광버스는 김천시를 향해 달렸고, 우리들을 축하라도 하는 듯 쏟아지던 빗줄기도 멈췄다.

'사람이 여행하는 것은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여행하기 위해서'라고 「괴테」는 말했고 '여행의 추억은 끊임없는 휴양'이라고 럿설은 갈파했다.우리는 먼저 김천시 대항면 직지사길에 소재하고 있는 시조 시인 정완영의 백수(白水)문학관에 도착하여 문학관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관람하였다.

백수문학관은 민족의 정서와 삶의 가락이 배어있는 한국 시조의 선구자로 시조의 중흥기를 열었던 한국 시조계의 거봉 백수 정완영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 문학인의 창작 공간 제공으로 지역 문학발전을 도모하고자 설립되었다고 한다.

자연과 아름다운 삶을 노래한 시조 시인 백수 정완영은 깨끗한 물, 오염되지 않은 물이 되어 세상을 정화하고자 했던 선생은 고향 김천에 그의 시 정신을 심고 있었다.

백수 정완영은 1919년 11월 11일에 탄생하시어 2016년 97세로 타계하셨다. 1960년대 초 청마 유치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데뷔했으며 조선일보의 신춘문예에 당선함으로 그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시조는 말로만 쓰는 시가 아니라, 말과 말의 행간에 침묵을 더 많이 심어두는 시와 내가 심고 갈 묵언은 먼 후일 어떤 모습으로 하늘 아래 나설 수 있을 것인가」와 같은 생각으로 창작에 대한 욕구가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여느 작가들 만큼 손놀림이 자유롭지는 못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글을 쓰는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잡혀가 고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백수의 독특한 문학세계도 주목 할만 했다. 작품 밑바탕에는 유. 불. 선이 들어가 있는 것이 특징인데 작품 상당수가 세상을 관조하는 느낌이라는 평가다. 이는 백수가 시조 시인이라는 길만 걸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시는 미쳐야 쓸 수 있다."며 "시조는 격이 떨어지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산문이 된다."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문학관을 흥미롭게 관람하고, 직지사로 향해 경내의 꽃무릇을 돌아본 뒤 사명대사길 공원에서 기념촬영도 하였다.

직지 권에 도자기 박물관 등 많은 관광 시설들이 있었으나, 오후에 또 많은 비 소식이 있고, 다음 일정이 있는 관계로 서둘러 직지사 주차장 근처 한 식당으로 향했다.우리는 식당에서 맛있게 산채 정식과 더덕 동동주를 곁들여 마셔가며 즐거운 식사를 마쳤다.

버스는 다시 영동 옥계폭포로 향했다.

여성 폭포라고도 하는 옥계폭포에서는 거의 폭우 수준의 빗줄기가 쏟아졌으나, 우리들은 해설사의 자세하고 흥미 있는 폭포의 전설 이야기에 경청하였다.

폭포도 여자와 남자가 있는데 옥계폭포는 음폭(여자 폭포)라고 한다. 그런데 언제 생겨났는지 폭포가 내리 꽃히는 웅덩이 안에 우뚝 솟은 양바위가 생겨났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물 한가운데 우뚝 솟은 양바위가 폭포의 경관을 해친다 하여 멀리 옮겨 버렸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마을에는 희귀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 가릴 것 없이 남자들은 객사(客死)를 하거나 사고로 죽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몇몇 사람들이 모여 양바위를 옮겨 벌어진 일이라고 입을 모았고, 다시 양바위를 제자리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음폭과 양바위의 신비로운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자 거짓말같이 마을은 예전처럼 평온해졌다는 전설(傳說)이 있다. 불임(不姙)인 사람은 영동 옥계폭포에 와서 음기(陰氣)를 듬뿍 받아 소원(所願)을 이룬다는 전설이 있다고 하며 해설사는 말을 마쳤다.

고향이기도 한 '박연'이 대금을 불다 아름다운 난꽃과 주변 경관에 취하여 본인의 호를 '난계'라 지었다는 옥계폭포를 뒤로했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어느덧 옥천 정지용 문학관에 도착하였다. 문학전시실에는 대표시 '향수'를 비롯하여 정지용 시인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191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순서대로 쓴 현대시의 발전과정을 한눈에 볼 수가 있었다.

정지용 생가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부엌을 제외하고 정면 2칸은 퇴칸 구조이다. 이 외에 돌담과 사립문, 초가, 우물, 장독대 등이 소담스레 자리하고 있었다. 작은 사립문 사이로 생가에 들어 서면 자신도 모르게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노래 '향수'를 흥얼거리게 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 얼룩배기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질화로에 재가 식어가면 /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중략)



이렇게 많은 것에 아쉬움을 남기며 발길을 돌려야 했던 명소들을 다음으로 기약해 보며 대전역 동광장으로 돌아와 회원님들과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최병부(사)한국문인협회 서산지부장
최병부(사)한국문인협회 서산지부장

이처럼 추억의 여행길에서 성숙의 탑에 또 하나의 돌을 쌓는 기회가 되었으며,내 인생 노트에도 아름다운 기록의 한 페이지로 남을 것이다.

「마지막 과일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라고 '가을 날' 의 시를 읊은 『릴케』를 생각하며 집을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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