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경구 아동문학가

일주일 정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래저래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피곤이 두 눈에 가득 매달려 있었다. 거울을 보며 씨익, 연신 입꼬리를 올려보지만 피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오후 쉴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다. 오전 일을 더 열심히 했다. 점심으로 먹은 순두부는 다른 때보다 더 부들부들 잘 넘어갔다. 무거웠던 몸도 가볍고.

왜냐하면 오후에 코스모스를 보러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올 가을 충주에는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있는 곳이 생겼다. 말로만 듣다가 직접 가기로 하니 설렘도 가득이었다.

숟가락을 놓자마자 차를 타고 출발했다. 파란 하늘에 몽실몽실 하얀 구름도 어찌나 예쁜지 꼭 명화에 나오는 그림 같았다.

나도 모르게 김상희의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이란 노래를 흥얼흥얼 거렸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 기다리는 마음같이 초조하여라. 단풍 같은 마음으로 노래…."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는 그냥 흘려들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가을이 오고, 코스모스를 보면 늘 이 노래가 먼저 생각난다.

라디오에서 이 노래를 들으면 실제로 코스모스 길을 걷고 있는 것 같고, 오래 전 동네 양쪽으로 있었던 코스모스 길이 떠오른다.

이 노래는 내 나이랑 나이가 비슷하다. 1967년도에 발표된 곡으로 김강섭 작곡, 하중희 작사로 만들어졌다. 예전 한국갤럽이 조사한 '가을'하면 생각나는 노래로 1위에 선정되었다고 한다.

노래를 부르다 보니 충주탄금공원(구, 충주무술공원)옆 국가정원예정지에 도착했다. 코스모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시민과 함께하는 정원문화 확산을 위해 충주시가 조성한 거라고 한다. 약 3만 5천 제곱미터 크기다. 대략 축구장 5개 넓이 정도라고 하니 감이 온다.

정말 코스모스를 보니 눈이 왕방울만 해지고 입이 쩌-억 벌어졌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코스모스를 처음 봤기 때문이다. 살짝 바람이 불자 하양, 분홍, 빨강의 코스모스가 일렁거렸다. 꼭 멀리서 꽃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풍덩, 몸을 맡기면 내 몸도 꽃물이 들 것 같았다. 가을에 흠뻑 취하고 싶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가족, 친구, 연인들의 얼굴도 모두 꽃이다. 연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노란 병아리 같은 아이들도 어린이집에서 단체로 왔나 보다. 똑같은 옷을 입고 코스모스 길에 조르르 서서 사진을 찍었다. 해맑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찰칵, 함께 찍혔을 것이다.

코스모스 길을 한참 걸으니 어릴 적 동네 길이 떠올랐다. 차 한 대가 지나가면 뽀얀 먼지가 폴폴 나는 신작로. 가을이면 이 신작로가 참 좋았다. 항상 코스모스가 피어있었다. 삼색 코스모스가 긴 목을 빼면 나는 조금 외롭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른 꽃에 비해 코스모스는 가늘고 연약해 보였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그래도 가을 동네 길을 꿋꿋이 지켜 주었다. 등하굣길 한 손으로 쓰윽 코스모스를 대고 가면 기분이 좋았다. 손에 닿는 촉감이 그냥 좋았다.

그 코스모스 길은 다른 길에 비해 깨끗했다. 월요일인지 무슨 요일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길을 쓸었기 때문이다.

한 4학년부터 6학년까지 쓸었던 것 같다. 몇 사람이 주전자에 물을 담아 먼저 물을 뿌린다. 그다음 6학년이 가장 큰 빗자루로 길 중간을 쓴다. 그리고 나면 그 빗질 옆으로 아이들이 빗질을 한다. 다 쓸고 나면 빗질이 마치 빗살무늬처럼 나 있다. 꼭 물결이 일렁이는 듯하다.

우리는 그 빗질무늬를 최대한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까치발을 해 집으로 갔다.

그 길 양 옆으로 핀 코스모스는 어른들의 사랑도 듬뿍 받았다. 창호지에 코스모스 꽃잎을 정성스럽게 붙이기도 했다. 한밤중 달빛을 받으면 겨울 내내 아름다운 코스모스를 볼 수 있었다.

김경구 아동문학가
김경구 아동문학가

어떤 아이들은 손톱 위에 코스모스 꽃잎 하나씩을 물로 붙였다. 그러고는 히히히, 하며 귀신놀이를 하기도 했다. 다리 위에 앉아 코스모스 꽃잎 한 장은 남기고 한 장은 떼어내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 코스모스를 다리 아래로 놓으면 빙그르르 바람개비처럼 돌아갔다. 냇물로 떨어진 꽃잎은 누구의 것이 먼저 내려가나 달리기 시합도 하면서 놀았다.

국가정원예정지에서 코스모스를 보고 온 날 피곤이 싸악 사라졌다. 내 몸에서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코스모스 꽃물이 그 어느 가을보다 더 오래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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