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김현진 청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평일에 뭔가를 즐기는 일은 팔자에 없나 보다. 그 날도 두 달 전부터 계획된 일정이었다. 비상근으로 재직 중인 다문화센터 직원들과 마음먹고 가을 단풍을 보러 나선 길이었으나 설렘은 금방 깨졌다.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오면서.

"여보세요. 저는 아파트 보안담당입니다. 어르신께서 사고를 당하셔서 지금 길에 앉아계시거든요. 좀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제가 멀리 있습니다. 우선 119로 이송해주시면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통화를 마쳤다. 여든 중반의 어머님께서 마트에 가는 길, 아홉 살 아이가 서 있는 자전거에 부딪혔는데 하필 그 자전거가 길을 지나던 어머님 쪽으로 쓰러진 것이다. 그 충돌로 어머님이 넘어지면서 골반과 머리에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큰일이다. 남편도 멀리 출장 중이었고 단풍을 보러 갔던 나도 병원까지 가려면 한 시간이 넘게 걸리고, 단체 출장이라 차도 가져가지 않은 상황이었다. 119구급대원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병원으로 이송 중인데 보호자가 필요합니다. 언제쯤 오실 수 있는지요?" "한 시간은 족히 걸립니다. 다른 사람 보내겠습니다"라고 답변하고 나니 전화할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다. 평일 오후에 다들 직장에 있을 텐데 누굴 부른단 말인가.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평소에 내가 어떻게 살았나 잠깐 되돌아보았다. 아, 사람이 없다.

그러다 문득 스치는 얼굴. 어머님이 아시는 분이면 좋겠다 싶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는 분께 전화를 드리고 병원 수속을 부탁드렸다. 너무나 흔쾌히 바로 가보겠다 하시며 상황을 수습해주신 그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나는 누군가에게 이럴 때 힘이 되어줄 수 있을까. 일이 급하다 다른 사람 보내라 한 적은 없었던가. 부탁하는 이의 사정은 아랑곳없이 말하거나 행동한 적은 없었던가.

우리 분야의 연구에서 가장 많이 하는 질문 중 하나는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할 이웃이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넘겼던 이 질문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동안의 나는 누군가에게 굳이 도움을 요청할 일이 없었다. 웬만한 일은 혼자 잘 해내거나 가족이 채워줄 수 있는 정도였다. 내게는 일어날 것 같지 않던 '도움을 청하는 일'이 예고 없이 어느 날 생겼고 그제야 나는 제대로 알았다. 왜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지.

다행히 어머님은 약간의 타박상만 있어 4일 정도 입원 후 퇴원하실 수 있었다. 지천명에 달한 내 생애주기에서 반드시 겪어야 하는 일이 부모의 부양과 이별인가보다. 또래 친구들 대부분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었다. 그래서 내 상황에 대해 깊이 공감했다. 앞으로 또 그런 일이 있으면 언제든 전화하라고 말해주는 선배도 있다. 말로도 천 냥 빚을 갚는다더니 그 말 한마디가 큰 힘이 되었다. 나도 당신의 일에 언제든 '긴급출동'을 하겠노라 서로 다짐을 해두었다.

일상은 이렇게 수많은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내가 도움을 주기도, 받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SNS로 친구를 사귀고, 조별과제를 기피하고, 혼자 있기를 즐기는 학생들을 보면서 그러면 안 된다 말해주고 싶은데 그게 또 잔소리일까 싶어 입을 닫는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때, 살아보니 이렇더라 하는 어른들의 말이 귀에 담기지 않았던 것을 잘 알아서다. 그래도 말해주어야겠다. 혼자 해결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고. 내 주변의 사람을 잘 살펴야 내 삶도 안녕하다고 말이다.

김현진 청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김현진 청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요즘 트렌드인 '느슨한 연대'의 출발은 SNS상에서 클릭한 번으로 맺어진 관계를 뜻하는 데 쉽게 맺어진 만큼 쉽게 단절되기도 한다. 시대가 변했으니 느슨하든 끈끈하든 '연대'를 한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다. 당신은 누구와 연대하고 있는가. 서로를 지지하면서 품앗이하듯이 서로 도울 수 있는 정도에서 마음의 연결과 연대가 이루어진 나만의 119 이웃이 있으신가.

단풍을 보고자 나섰던 나의 소박한 하루는 이렇게 끝났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끈끈한 이웃을 얻게 된 것 같아 기쁜 마음이다. 느슨한 관계 속에 필요한 순간 드러난 이웃의 진심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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