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지리산 노고단에서 맞는 아침이다. 산봉우리들이 운해 속에 떠있는 섬같이 보인다. 계곡을 따라 골바람이 세차게 불어댄다. 황홀한 노고단의 아침은 또 하나의 감동이다. 눈꽃의 향연이 펼쳐진다. 겨울을 품은 하얀 풍경이다. 나뭇가지마다 크고 작은 얼음 꽃들이 보석처럼 피었다. 바람의 향방에 따라 얼음 결정체가 여러 겹으로 달라붙어 있다. 결정은 눈 모양과 비슷한 판상, 침상, 수지상樹枝狀 등으로 이루어진다. 구상나무에 핀 꽃들은 마치 크리마스 트리를 보는 것 같다. 눈꽃 풍경삼매경에 빠져서 넋을 잃고 말았다.

이렇게 선명하고 또렷한 상고대는 처음이다. 가끔 한겨울 강추위에 뭉친 서리나 눈발이 내리는 날, 이른 아침에나 얼음꽃을 조금 볼 수 있다. 올라갈수록 눈꽃의 크기와 폭은 점점 더 커졌다. 작은 나무들은 하얀 솜털 옷을 입었다. 이것은 바람이 약한 맑은 밤과 이른 새벽 사이에 나무나 물체의 바람을 받는 쪽에 생긴 것이다. 안개 입자가 함께 붙어 비늘과 깃털모양으로 수빙을 만들기도 한다. 나뭇가지에만 피는 것이 아니라 등산길 고목 등걸에도 피고, 바위에도 온통 엉겨 붙어 있다. 아직도 내 인생의 뒤안길에는 숱한 상처와 흉터들이 남아있다. 아픔과 슬픔들이 위로를 받으며 안식하고픈 마음을 갖는 것이 혹여 지나친 욕심일까. 바람은, 농익은 노년의 삶으로 익어갔으면 좋겠다는 상념 속에 잠긴다.

작은 나뭇가지들도 솜사탕처럼 눈꽃 송이로 둘러 싸여 있다. 푸른 이끼를 입은 바위도 하얗고, 세월의 인고를 짊어진 나무껍질도 흰색이다. 만산이 백설 옷으로 덮여 있어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모든 색깔을 반사해주는 영롱한 빛들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골바람 따라 눈가루가 흩날리며 볼을 스쳐가도 감미로운 온기가 느껴진다. 노고단 올라가는 오솔길을 걷다보니 겨울 왕국에 서 있는 왕자 같은 기분이 든다. 이곳에서 세상의 근심과 걱정이 사라진다. 시련도 없고 고통도 없다. 온통 희열과 행복한 마음만 가득할 뿐이다. 천국이 이 마음자락에 머문 것 같다.

잣나무가지에서 겨울밤 잠을 자던 새들이 푸드득 날았다. 나뭇가지에 소복하게 쌓인 눈가루가 자막처럼 떨어진다. 안개가 자욱한 숲길 저편에서 아침밥을 짓고 부엌에서 손을 씻고 나오는 어머니의 환상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름을 부르며 가슴에 안기고 싶어 손을 흔들고 발걸음을 서두르며 달려갔다. 비탈길에 허둥대는 발이 미끄러지며 몸이 균형을 잃어버렸다. 바닥에 엉덩이가 쿵하고 닿는 순간 꼬리뼈에 짜릿한 통증이 전율이 전해온다. 눈시울이 시큰하다. 한참동안 눈을 감았다가 떠보니 아무도 없다. 짙은 그리움만 허공으로 날아갔다.

어린 시절에는 순수하게 꿈을 꾸며 순백의 삶을 살고자 했다. 남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고 정을 나누며 넉넉한 마음으로 생활하고 싶었고, 사랑받고 사랑을 주는 알콩달콩 행복한 꿈도 꾸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상고대의 설국처럼 아름다운 삶을 이루고픈 바람이 가슴에 가득했었다. 숱한 계절이 바뀌고 강산이 변하여 말없이 흐르는 강물은 회룡포를 만들었고, 삶의 터전에서 수많은 경쟁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성취욕에 넘어지고 지친 다리를 끌며 다시 돌아온 여정에는 영광의 상처들이 얼룩져 있다. 덕지덕지 세월의 때가 묻은 주름살엔 검버섯도 피었다. 손마디가 굵어지고 손바닥엔 굳은살이 두텁게 자리 잡았다. 지나온 발자국 마다 누군가 아름다운 동행이 있음에 입가에 감사한 미소를 보낸다.

봄날의 연둣빛도 가고, 오월의 장미도 지고 말았다. 햇빛이 작열하는 여름도 가을바람에 저물었고 찬 서리를 맞은 단풍은 낙엽 되어 하얀 눈밭에 숨었다. 12월 달력 한 장이 거실 벽에 남아있다. 한 해의 마지막 잎새이다. 한 달의 사랑을 남기고 내일을 위한 기다림으로 서 있는 것이다.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노고단 언덕에 도착할 무렵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이다. 파란하늘과 낮게 깔린 운해로 황홀할 지경인 노고단의 아침이다. 동쪽을 향하니 멀리 구름안개 너머로 여명이 비춘다. 사람들 어깨너머로 저 멀리 무등산 자락도 보인다. 붉은 빛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가슴 뭉클하게 솟아오르는 감격에 목젖을 삼키며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본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